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배는 큰 형벌이었지만 조선초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그 후 사림파가 정치권력을 얻은 뒤에도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이는 영조, 정조 대에는 노론, 소론 등의 대립으로 심화되게 됩니다. 조선 중기에는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치적 탄압을 받는 여러차례의 사화가 있었고 그 뒤 정치권력을 잡은 세력이 급격하게 몰락하거나 변화하는 환국이 여러 번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조선의 왕들이 왕권강화를 위해 사화와 환국을 일으키게 되지만 신하들의 세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어느 한 쪽 당파에 과도한 권력이 가는 것을 막으려는 왕들의 노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당파들의 권력싸움 속에서 유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유배지에서 지역을 이동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지만 유배지의 일정한 구역 내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저술활동과 과학탐구 활동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대표적으로 유배지에서 많은 실학과 관련된 책을 쓰고 과학적인 성과물을 낼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배라는 형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당파싸움의 결과에 따라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가 어느 정도 허락되었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