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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7.31

사육신의 복권은 언제되었나요?

세조시기에 단종복위를 꿈꾸다가 역모로 몰려서 죽은 사육신들의 복권은 어느 왕이 즉위한 시기에 되었나요? 사육신들의 후손중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요? 이들의 제사는 누가 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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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육신은 성종 때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부터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정조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배향(配享)하기로 하여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육종영(六宗英)이라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화의군·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이양(李穰)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사의척(四懿戚)이라 하여 송현수(宋玄壽)부터 권자신(權自愼)·정종(鄭悰)·권완(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세 재상을 삼상신(三相臣), 민신(閔伸)·김문기(金文起)·조극관(趙克寬)을 삼중신(三重臣), 성승(成勝)·박쟁(朴崝)을 양운검(兩雲劒)으로 하였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이보흠(李甫欽)·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불이문(不二門)·홍살문·비각(碑閣) 등을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金寧) 김씨(金氏)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이개·유성원·박팽년·하위지·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두어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顯彰, 밝혀 나타냄)하기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육신에 대한 추숭은 숙종 17년에 와서야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능행에서 돌아오면서 노량진을 지나다가 육신의 무덤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성삼문 등 육신을 복관(復官)하고, 무덤 가까이 건립되어 있던 육신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명령이 내려가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찬반의 논란이 벌어졌는데, 결국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이 명령은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으로 대표 되는 사람들 중 박팽년을 예를 들며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본인, 형제로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박팽년의 아들 박헌(朴憲)·박순(朴詢)도 죽임을 당하였고 박분(朴苯)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가 없는 경우에는 그 외손이 제사를 같이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외척들도 거의다 노비가 된 경우에는 제사 조차도 한동안은 드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육신의 복권은 대한민국에서 1972년에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사육신의 복권은 경마, 도박, 복권 관련 사업을 통제하고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으로서, 경마, 경륜, 경정과 같은 경마산업과 복권 판매 등에 관한 허가를 일정한 기준과 규정에 따라 행정부가 발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복권은 국가 예산 수입 증대 및 불법 도박 차단 등을 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복권 발급은 기준과 조건을 만족하는 사업자들에게 정부 기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서 이루어지며, 복권 판매로 얻은 수익은 국가 예산에 기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복권은 국가 예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구매하는 대중적인 형태의 도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