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살 사건 이후 김재규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건은 1979년 10월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안가의 궁정동 별장의 술자리에서 신재순,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밖에서 돌아온 김재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 라는 고함과 함께 미제 스미스 웨슨 리벌버 권총을 꺼내 두발을 쏘았는데 첫발은 경호실장 차지절 오른쪽 손목에 맞았으며 두번째는 박정희의 가슴에 맞았다고 즉석에서 사망한 사건 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중정 부장이던 김재규가 차지절등에게 권력에서 밀리자 이에 대한 보복성 테러 라고 결론 내었고 미국정부의 연관성도 제기 되었으나 결국 증거 없음으로 결론 났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이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을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암살계획을 세워 소수의 중앙정보부 간부들과 모의하였습니다. 김재규는 박전대통령과 차지철을 암살하고 옆 건물에 미리 와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대통령 유고를 알리고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이 육본으로 갈 것을 요구했고 김재규는 중정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판단을 잘못하여 육본으로 가는 바람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후 계엄이 선포되고 이희성 대장 계엄사령관에 임명되고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이 수사단장이 되었습니다. 육사 11기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등을 경계하던 정승화는 전두환을 동해사령부로 전출시키려 하자 전두환은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를 내란죄로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릅니다. 군사재판이 시작되었고 반란 및 내란죄로 김재규 등 사형이 선고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고 대한민국은 또다시 군부독재가 실시되었습니다.시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나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며 민주주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라고 항변했으나 그 소리는 재판장에서만 떠돌았을 뿐 어떤 언론에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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