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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7.24

암행어사는 마패의 말을 다 쓰면 어떻게 했나요?

암행어사는 마패에 그려진 수만큼 역참에서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해진 말의 수를 다 사용했을 때에는 걸어서 이동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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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패에 그려져 있는 수만큼의 말만 빌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패(馬牌)는 조선 상서원(尙書院)에서 발행한 둥근 동판의 표지이다. 관리들이 공무로 지방 출장을 갈 때 역(驛)에서 말을 징빙할 수 있는 일종의 증빙 수단이었다. 표면에 1 ~ 10마리의 말을 새겨 그 수효에 따라 말을 내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말 10마리가 찍힌 마패는 임금이 사용하는 마패이므로 일반 관리들은 사용할 수 없고 암행어사들은 그보다 말의 숫자가 적은 마패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름이 10cm 정도이며 한쪽 면에는 상서원인(印)의 자호(字號)와 연월일을 새기고 다른 한쪽에는 말을 새긴 것으로, 어사가 이것을 인장(印章)으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징발할 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며 품계에 따라 차등 지급됐는데, 공무가 끝나면 다시 반납해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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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원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패(馬牌)

    마패는 관리들이 공무(公務)로 지방에 갈 때 나라의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증표로 쓰던 패입니다. 지름이 10cm 정도인 동그란 구리 패에 말 그림이 1-10마리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 지역에 말을 빌릴 수 있는 역(驛)을 설치했습니다. 관리들은 역에서 역으로 이동하며 잠도 자고 말도 바꾸어 탈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역참제(驛站制)라고 합니다.

    고려 후기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말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 때문에 허락받은 관리만이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패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처음에는 마패를 나무로 만들었지만 쉽게 부러지거나 손상되자 1434년(세종 16)에 철로 만들어 사용했고, 이후에는 구리로 만들었습니다.

    마패는 양면에 각각 다른 내용을새겼습니다. 한 면에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는데, 이는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다른 면에는 주조 일시인 ‘연호(年號)와 연월일’과 임금의 도장을 담당하는 관청인 상서원(尙瑞院)에서 이 마패를 발급했음을 증명하는 상서원인(尙書院印)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마패로 부릴 수 있는 말의 수는 1-10마리까지지만, 실제로는 1-3마리 정도였습니다. 암행어사의 경우도 대부분 3마리가 그려진 3마패를 썼고, 10마리가 그려진 것은 왕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마패를 발급했습니다.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중앙의 경우 왕명(王命)을 받들고 다니는 관원은 병조(兵曹)에서 증서를 받으면 상서원에서 왕에게 보고해 마패를 발급한다고 규정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 등이 마패를 지급 받아 보고를 올리거나 진상(進上)을 하는 등 필요한 때에 말을 이용했습니다. 군사 사정으로 긴급한 경우는 쌍마(雙馬)를 이용하고 ‘긴급사(緊急事)’라는 글자를 새겨 밤낮으로 달리게 했습니다.

    마패를 파손한 자는 장(杖) 80, 도(徒) 2년의 형벌이나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1511년(중종 6) 12월의 기록에 보이는 상서원의 서리(書吏)로 근무하던 최맹손(崔孟孫)같이 마패를 도둑질해 술과 밥으로 바꾸어 먹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또 중국의 왕조가 바뀌면 대부분 연호(年號)를 바꾸었으므로 마패 또한 자주 다시 만들었습니다. 1730년(영조 6) 6월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각 지방에 160여 개, 중앙에 500여 개 등 모두 670여 개의 마패를 주조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 대에는 여전히 명나라 연호가 새겨진 마패를 사용하다가 청나라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조 6년(1730) 제주 사람이 표류해 청나라에 이르렀는데, 그가 가진 마패에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가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전부터 쓰던 마패를 미처 다 교환하지 못한 것이라 해명하며 해결되었지만, 『영조실록』의 여러 기사에서 당시 한 달간의 급박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마패는 왕의 특명을 받고 비밀리에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인 암행어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암행어사는 왕에게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유척(鍮尺), 마패를 받고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봉서’는 암행할 지역과 임무가 적힌 비밀 편지이고, 『사목』은 암행어사의 할 일을 적어 놓은 책입니다. 또한 ‘유척’은 시체를 검시할 때 쓰는 자이며, ‘마패’는 역에서 말을 빌리거나 역졸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증명하는 패입니다.

    암행어사에게 발급하는 마패는 왕과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숙종과 영조는 3마패를, 고종은 주로 2마패를 주었습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암행어사에게 상등마(上等馬) 1필, 중등마(中等馬) 1필과 짐을 나르는 태마(駄馬) 1필을 주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암행어사는 관리 중 품계가 높지 않은 당하관(堂下官)이었지만, 임무의 특성상 고관(高官)만이 타는 상등마를 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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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 )

    자료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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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암행 어사의 마패에 그려진 말은 한번에 동원 할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는 것이지 유효 기간이나 횟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전해진 기간 내에서는 그 횟수에 상관 없이 말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예를 들어 말이 3마리가 그려진 마패를 사용 할 경우 오늘 이 역에서 말을 3마리 썼다고 해서 다음날 다른 역에서 3마리를 더 쓸수 도 있다는 것 입니다. 물론 3마리 이상은 쓸 수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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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가 사용하는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역과 역을 지날때

    지친 말을 반납하고 새로운 말로

    바꿔탈 수 있는 수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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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가 빌릴 수 있는 말은 보통 2~5마리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3마리 이상을 빌리면 사실상 나 암행어사다 하고 광고하는 셈이나 다름없어서 1~2마리만 빌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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