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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가마우지 257
착한 가마우지 25723.12.01

우리나라의 전근대 시기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상투를 한 기원이 언제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동아시아는 과거 민족에 따라 머리모양을 달리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근대 시기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상투를 한 기원이 언제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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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상투 풍습이 있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서 상투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예절과도 연결되어 더욱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상투는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상투관은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한 것 때문인데, 특히 머리숱 적은 노인들이 관을 쓸때는 상투에 거의 반드시 상투관을 썼으며 상투관 나무, 종이, 가죽, 뼈, 뿔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조그만 상투관 안에 상투를 집어넣으려면 상투의 사이즈가 작아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은 상투관을 쓸 때는 숱 정리가 더 필요했고신라시대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를 봐도 신분이 높은 주인은 관을 쓰고 하인은 상투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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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도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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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투는 어릴때에는 댕기를 드리다가 장가를 가면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정수리 부분에서 감아 매던 머리형으로 중국의 사기에 위만이 고조선에 들어올때 추결을 하고 왔다는 기록,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괴두노계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했다는 기록이있으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나옵니다.

    상투를 트는 것은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 남성으로서의 위엄 또는 과시의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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