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 청은 이 전쟁에서 패하고 이듬해 청일 간의 시모노세기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며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합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이 철거됩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 서재필이 1896년 1월 조선으로 와 중추원의 고문이 되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습니다.
2월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어 입지를 보존했고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됩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입니다.
이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가 독립협회의 모체이며, 독립문을 쌓기 위해 독립협회를 만든 것으로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 당시 정부 관료 중 외교적 역할을 했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고 1896년 5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 반면 러시아와 조선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가 더 커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