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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29

조선시대 효종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요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 다음 왕이 효종인가요? 효종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효종 시대에는 어떤일들이 일어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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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 · 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 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주1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곁에서 형을 적극 보호했다. 청나라가 산하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다.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錦州衛) 송산보(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 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었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상헌(金尙憲)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 · 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에 밀고해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주2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폈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세력을 잃음으로써 이듬 해부터 이완(李浣) · 유혁연(柳赫然) · 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했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주3에 통합하고 600여 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 명으로 증액하려 했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진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였다.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주4을 지급해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크게 강화하려고 원두표를 강화도로, 이후원(李厚源)을 안흥으로,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 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했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H.) 등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 ·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해 염초(焰硝) 생산에 전력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자주 참가해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麽兒廳)을 설치해 무장들이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했다. 이듬 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 검은 두루마기의 뒤를 터서 짧게 만든 옷)로 바꾸어 행동을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 확충에 노력했다.

    그러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효종의 군비 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군비 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다. 전세(田稅)주5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군비 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전(行錢)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 데 노력했다.

    문화면에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태음력의 옛 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 시간을 계산해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 해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 간행했다. 그리고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쟁 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 해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해 간행했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朝臣)들과 뜻이 맞지 않는 괴리현상이 일어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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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출처 - 지식백과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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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법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조선의 역법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점을 알고 태음력을 구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해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작을 게산하여 제작,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호서지방의 대동법을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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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대왕은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데 온힘을 쏟았는데,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출처:세종대왕 유적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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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으로 대군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즉위한 효종은 재위 기간 북벌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왕실의 잔치나 행사를 대폭 줄이고 사치는 억제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폈던 임금이다. 또한, 백성들이 구하기 쉬운 약재로 돌림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의학에 관한 책을 펴내고,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만 실시됐던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 고을까지 확대한 임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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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 다음인 왕으로 효종입니다. 가장 큰 업적은 북벌을 준비하여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서 세계의 흐름을 따라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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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인조의 2번째 아들이 효종 이호이며, 효종은 북벌론을 주도했던 군주로써 병력을 양성하고 북벌을 강하게 내세웠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와 더불어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다하였지만, 1659년 재위 10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어 이 북벌과 대동법 시행 외에 눈에 띄게 알려진 업적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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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벌추진입니다.


    전하 북벌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병자호란의 패배로 우리는 후금과 군신관계가 되었소. 이건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소.

    때문에 북벌을 추진하게 되었소.


    북벌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셨나요?

    나와 서인들은 북벌론을 계획하였소.

    나는 정예포병 10만명을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그런데 신하 송시열은 아니된다고 반대를 하더군..

    아! 어느날 네덜란드에서 표류해 온 하멜이라는 외국인을 보게 되었소.

    이 자의 지식과 문물이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도록 시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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