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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29

조선시대 효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요?

조선시대의 왕이 초기에는 적통성이 있는거 같은데 중기이후로 가면서 그 적통성이 안 지켜지는거 같은데 효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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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제17대 국왕입니다.

    청을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으로 잘 알려진 군주로서 10년 치세 동안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기도 하다. 대동법 등 인조대 갖은 외환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좌충우돌하던 제도개혁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아 시행했으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조선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송 효종과 홍치제가 받았던 '효종(孝宗)'의 묘호를 받은 것만으로도 당대 효종이 중흥 군주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재위 10년 만에 종기 치료를 하다 의료사고로 39세의 나이에 허망하게 사망했다. 그리고 효종의 죽음은 곧 그의 정통성 논쟁을 명분으로 한 조선후기 가장 유명한 당쟁인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왕비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3남[8] 6녀를 낳았고 후궁 안빈 이씨에게서 1녀를 낳았다.

    북벌론을 내세우며 정예 조총병 양성, 조총 개선 및 홍이포 등 대포 개량 등등 국방력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기도 했고, 전란 이후의 민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가지로 의욕이 강했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을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 군주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효종은 북벌이 개시되어 청나라가 다시 침공해올 때를 대비해 서울 근처의 방어 기지인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강했으며, 만일을 대비해 내부 방어 체계를 재정비했다. 다른 국방력 강화도 쌍령 전투 등으로 드러난 조선군의 한심한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군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훈련 강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해외의 역사학자들도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왕으로 세종과 정조 다음으로 효종을 뽑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게 일단 조선이란 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비해 군사력 증강에 인색하거나 군사력 증강을 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왕조인데 이런 조선에서 조선군을 잠깐이나마 강소국 수준의 군대로 발전시킨 효종을 높게 보는 이들도 일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효종은 왜란과 호란의 피해로 인해 모든 군사력을 증강할 순 없었던지라 표면적 강화만 했단 비판을 받기도 한다.

    출처: 나무위키 효종(조선)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의 적장자는 소현세자였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아우인 봉림대군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효종은 인조의 영향을 받아서 청나라에 대한 적대심이 강하였으며

    청나라 몰래 북벌을 준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