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는 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 당했는지?
안녕하세요? 한명회는 세조를 일으킨 최측근인데요 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했는지 이유를 알고 계신분 설명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 · 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습니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갔습니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김굉필(金宏弼) · 이주(李胄)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정여창(鄭汝昌) · 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 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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