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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4.01.29

이성계장군은 왜 위화도에서 회군했을까요?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의 시초가 된건은 위화도 회군이라고 하는데요.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한건 왜인지 궁금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관련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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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기 최영의 권유로 왕이 요동정벌 추진하였습니다. 그 배경으로는 당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로 과거 고구려 땅을 수복하고자 하는 염원은 계속 있어왔던 터라 명분이 있었고, 원나라가 망하고 난 후 부강해진 명나라가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땅을 내놓으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이에 친명 세력이었던 이인임 세력을 몰아내었고, 명나라의 홍무 연호를 폐기하고 북진을 준비하자는 최영의 의견에 우왕이 승인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명으로 진군하면서 위화도 인근에서 압록강 물이 불어나 14일을 진군하지 못하고 머물렀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여름에 전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모든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왜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없다/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떨어져 무기에 문제가 생기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다"라는 4가지 불가론을 주장하며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되려 이성계에게 하루 빨리 강을 건너라고 명을 내립니다.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는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의 역모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쩌면 전장에서 그를 도모하고자 선봉장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의 이유가 언급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상황으로 보았을 때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이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자신이 요동으로 보내지면서, 자신의 가족들은 볼모로 잡혀있었으니까요.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손을 잡고 위화도에서 회군하기로 결정을 하고 우왕과 최영은 서경에서 개경으로 옮겨 반격을 준비하였으나, 이방원의 책략으로 가족도 탈출하여 걸림돌이 없었던 이성계는 신진군부세력과 함께 쿠테타에 성공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이색과 조민수의 추천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됩니다.

    이후 조민수는 모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성계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되려 반격 당해 유배되고 창왕을 고려시대 요승이었던 신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공양왕 또한 폐위시키고 자신이 고려의 왕위를 이어받고, 이씨 왕조로 새롭게 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며 개국하게 됩니다. 조선은 처음 명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후 명과의 관계가 개선되며 인정받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정말 나라를 아끼는 마음에서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하였던 것인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와 정도전과 공모한 쿠테타의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명분을 얻어 추진한 것인가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화도 회군은 1388년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후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