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존재와 시간 이라는 하이데거의 저서를 읽어보았습니다. 와 제 식견이 짧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철학자가 이야기하고 싶은게 결국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존재를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 즉 현존재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고, 다른 것과 관계있는 '관심'으로서의 존재이며, 이 관심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에 직면하여 유한적인 시간성 속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되어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인 인간 존재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이며, 그 존재 방식은 '불안'이라는 것이며, 이 불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전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결국 무매개(無媒介)로 전체로서 초월하게 되며, 일상성으로부터 탈각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가 말하는 '세계-내-존재'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적 성격을 이룬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색 이후에(30년대 후반 이래), 새로운 사상의 전회를 보여주는데,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연구에 몰두, 존재 그 자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예를 들면 휠더린(F.Holderlin, 1770~1843)이 시어(詩語)로 말하고 있듯이 '성스러운 것', 즉 존재가 보여지고 있다고 하며, 이것을 사색에 의해 해명하는 데에 종사하였다. 이 성스러운 것인 존재 속에서 인간도 신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상을 주장하였다.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찾아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는 것이 실존론적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즉, '있다는 것'(존재)은 '없다는 것'이 인지될 때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의 유한성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죽음을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그 비판을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하이데거는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역사성'을 강조하므로써, 마치 '독일 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하라'는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설명 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데서 그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으로 이어지는 역사성'에서, 나치의 영웅적 결단에 편승하라는 메시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은 그의 사상을 단순히 철학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철학적으로 '죽음이 반성적 계기가 되는 것이 과연 옳으냐', '죽음이 과연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학자들의 비판도 유효하다. 죽음을 염두에 둔 반성이란 그렇지 않은 반성보다 더 극단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으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그 어떤 희망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선 오히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선택이 실존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죽음'을 실존의 근거로 두지 말고, '탄생'을 실존의 근거로 두자고 제안한다.
대략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전기, 나치 참여,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논란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그저 일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전기나 후기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실제로 하이데거가 총장직에 있었을 때 유대인 동료들을 내쫓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나치당원들이 유대인을 내쫓고 있었을 때 방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철학적인 측면에서 반유대주의가 있었느냐는 논쟁은 그동안 정말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하이데거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이데거 일기장인 「블랙 노트」에 나오는 반유대주의적 단어도, ㅡ 『세계상의 시대』에서 미국주의는 "계산"을 대표하고, 공산주의는 "계획화"를 대표하며, 국가사회주의는 "사육"을 대표한다고 말했듯이 ㅡ 기술 문명 비판의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뿐,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였다면 유대인 동료들을 가차없이 쫓아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하이데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 자체가 반유대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 상태인데 하이데거가 직접 나치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철학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라고 주장한다.[네이버 지식백과] 하이데거 [Heidegger, Martin]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윤용택, 황태연, 이성백, 이정우, 양운덕, 강영계, 우기동, 임재진, 김용정, 박철주, 김호균, 김영태, 강대석, 장병길, 김택현, 최동희, 김승균, 이을호, 김종규, 조일민, 윤두병), 나무위키 마르틴 하이데거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존재란 '존재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존재의 의미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 가지는 의미를 말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면, 우리는 인간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저역시도 정확히 하이데거가 아니기에 100프로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대변할수는 없지만 시간이란 개념이 이낙ㄴ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각자의 위치와 입장에서 이해하고 찾아가라는 의미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하이데거에 대한 한 연구자의 시각을 소개합니다.
“하이데거는 진리가 스스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가 그렇게 존재하는 그 근원적인 곳에서 그 존재의 진리는 우리를 그 찬란한 빛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자가‘존재한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마치 빛과 같이 경험된다. 이것은 찬란한 경험이며, 모든 세계를 아우르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는 존재의 진리의 소리 없는 부름으로부터 이 부름에 조용히 응답하며 다가오는 자들이 이 시대의 황량한 운명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존재자의 참다움을 간직하는 존재의 진리는 ‘스스로 환하게 밝혀져’있으며, 그 곳에 머무는 현존재에 의해 집지어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있음’을 경험하고, 이것은 훤히 밝혀져 있는 존재의 근원적인 고향이다. 결국 존재 물음이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진리의 터를 향하여 귀향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장 깊은 시원’으로 ‘신’을 이야기 한다. 신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미를 참답게 열어주는 가장 깊은 근원이 되며, 이러한 근원에서 존재의 진리를 지키면서 인간 현존재에게 말없이 눈짓하며 스쳐 지나가는 신을 하이데거는 ‘궁극적 신’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진리에 깨어있는 자만이 ‘정적의 울림’으로서 울려오기 시작하는 존재 자체의 심연 속에서 궁극적인 신이 자신의 현존을 보내오는 그 성스러운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이야기 하였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존재를 스스로 이해하고있는 인간의 존재, 현존재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며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고, 다른것과 관계있는 관심으로서의 존재이며, 이 관심을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에 직면하여 유한적인 시간성 속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되어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입니다.
실존인 인간 존재는 무 로 돌아가는 존재로 그 존재 방식은 불안이라는 것이며 이 불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전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결국 무매개로 전체로서 초월하게 되며, 일상성으로부터 탈각한다고 하며 이러한 인간의 존재 방식이 그가 말하는 세계-내-존재 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적 성격을 이룹니다.
하이데거는 이 후 새로운 사상의 전회를 보여주는데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연구에 몰두하여 존재 그 자체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성스러운 것, 즉 존재가 보여지고 있다고 하며, 이것을 사색에 의해 해명하는 데에 종사합니다.
이 성스러운 것인 존재 속에서 인간도 신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상을 주장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이후로 "어떠하다(성질)”라는 뜻을 "존재"라는 개념을 써서 접근하려고 했지,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에 대한 모든 연구가 특정한 성질에만 국한되어있고, 존재 자체를 어떤 성질이 있는 형질로 취급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미 상정하는 전제"를 분석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탐구하는 데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철학자와 과학자가 더 기본적이고 이론에 앞서는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며, 우리가 존재와 인간 존재를 그릇되게 인정하였다. 이러한 뿌리깊은 몰이해를 피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를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후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철학에의 기여》, 《기술에 대한 논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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