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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22

일제시대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사변은 그 배경과 원인이 무엇입니까

1921년 일제시대 자유시사변 발발 하는데요 이 자유시사변이 발발한 배경과 장소 그리고 원인은 무엇인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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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유시사변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소련은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려 했다. 그러자 일제는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은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던 독립군이 이에 불응하자 공격을 감행하여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었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주2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주4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 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주5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주6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유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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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성서 독립군에 대패합니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며 간도의 동포, 노령 연해주에 살고있던 동포들도 많을 피해를 당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혁명 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고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합니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상황이 위태롭게 되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밀산에 집결합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 5백명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해 제 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습니다.

    이때 김좌진은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우수리강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에 집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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