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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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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한국 정부가 조선의 왕족인 덕혜옹주가 귀국 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덕혜 옹주는 어떻게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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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여행자75
    시간여행자75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대 초반에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이 병원에 입원 중이던 덕혜옹주를 방문하였다가 충격을 받아 반드시 귀국시켜야 한다고 결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961년 11월 김을한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를 만나, 병상에 있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의 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귀국은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은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 부부의 귀국을 적극 돕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고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유모 변복동 및 상궁들, 그리고 옛 학교 친구의 마중을 받으며 3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생활은 낙선재에서 했으며,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다가 이후 통원치료 할만큼 경과가 좋아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인 홍유릉(洪裕陵)의 부속림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조선의 황실을 아주 싫어 했습니다. 그래서 약 20년간 덕혜 옹주는 귀국을 못 했는데 결국 덕혜 옹주는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英親王)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2년 덕혜옹주는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의 노력과 방정희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결단으로 37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김한을은 특파원으로 일본에 머무를때 수소문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라며 눈물을 흘렸으며,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생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국적을 회복시켜 귀국시키는 등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이때 박정희는 고종에게 딸이 있느냐 며 놀랐고 당시 덕혜옹주는 원래도 남자 왕족이 아니라 왕위계승권이 없어 이복오빠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는데 정신병이 재발 한 후 오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탓에 잊혀진 상태였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공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황족들의 국적 회복과 귀국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는 대한민국이란 공화국의 상징성과 근본적으로 이승만이나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나 다름 없던 대한제국 황실을 혐오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정부가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해 몰락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을 당시 장면이 영친왕에게 주영대사직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그즈음 영친왕은 뇌일혈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고사했고 이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한국이 공화국으로 확실히 기반을 잡아 옛 황족들이 이제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해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이건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모두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덕혜옹주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성장하였는데요 그래서 일본에서 결혼하고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이 전쟁을 하게 되면서 덕혜옹주는 꾸준히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조선 왕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왕실 후손으로 인정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는데요. 다만 당시 한국 정부는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이미 성장했었고 당시 일본과 전쟁중이었기에 일본에서 돌아오면 일본의 반발을 사는것을 우려아여 귀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덕혜옹주는 정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비밀리에 일본의 군함에 숨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덕혜옹주의 실상은 김을한에 의해서 알려지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귀국이 됩니다박정희 정권에서는 황녀가 귀국해도 자신의 입지에

    영향이 없을테고, 민족심을 일깨운다는 의미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특파원 김을한이 일본에 머무를 때

    수소문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국적을 회복시켜 귀국시키게

    되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英親王)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창경궁(昌慶宮)낙선재(樂善齋)와 연결되어 있던 수강재(壽康齋)에 칩거하였다. 계속된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다가 1989년 4월 21일 상오 11시 40분에 별세하였다. 그 해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소재한 홍유릉(洪裕陵)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렸으며, 남편은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1946년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옮겼습니다.결국 덕혜는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과 이혼을 했고 딸 정혜의 실종과 죽음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운명으로 결국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졌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고 이 무렵 서울신문의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귀국 할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에 한국 정부가 달가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당시 정부가 정치적으로 손해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국민들이 환영하는 마음도 컸기에 잠깐 방문은 할 수 있었이지만, 길게 있을수는 없었고 사망하고나서야 다시 올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망했으니 그만큼 정치적 상징성이 없어져서 유해가 돌아올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