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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소보로크림빵
단팥소보로크림빵23.04.30

남한산성은 어느 시대에 축조한 것인가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신성리에 있는 남한산의 산성이 남한산성은 광주시와 성남시와 하남시에 걸쳐서 축조된 성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을 최초로 축조한 고대시대는 어느시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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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운 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웠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이다.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 · 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백제 왕도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 《대동야승(大東野乘)》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대부분 조선 시대 책들은 백제 고성이라고 적었다. 다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계통 유물은 나왔지만 백제 계통 유물이 마땅히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약점이다. 아무래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으니 백제의 물건을 치웠을 수 도 있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 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바로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그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설 역시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자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과 그 주변 지역 발굴조사 결과 신라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고는 재침에 대비하여 개조되었다. 개조 완료 후 광주목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기본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숭덕제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 전이었다. 병자호란 때 결국 함락되었다는 점 때문에 입지가 요새로서 탈락이고 심지어 평지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막상 가보면 산세는 지금도 험준하고, 급히 도망쳐 들어간 데다가 방산비리까지 겹쳐 물자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막강한 청군의 서양식 화포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달 이상을 버텨냈음 자체가 방어능력을 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밑에서 남한산성을 보면 청나라군이 물리적으로 함락하지 못한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공방전 40여일 동안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성 내부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였다. 결국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된 탓에 항복했다.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인데, 신해 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다.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다.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유구 상태가 굉장히 훌륭했다.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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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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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을 축조한 시기와 주체에 대해서 2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에 세웠다는 것과,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이라는 의견입니다.

    백제가 쌓은 성이라는 주장은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가

    축조한 것이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등 대부분 조선시대 책들은 백제 고성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신라가 쌓은 성이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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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있었고 조선 인조때 손보았습니다.

    세운시기와 주체에 대해 여러 주장이있는데,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웠다는 것,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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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의 경우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유물들이 확인되면서



    백제가 이 지역을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란 견해가 존재하긴 합니다.



    당시 백제 수도였던 오늘날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입장에서



    남한산성은 남쪽지역에 대한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유물만 확인되었을 뿐, 구체저인 유구는 확인된 바가 아직까지는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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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료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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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던 곳이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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