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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9.08

선덕여왕은 어떻게 집권하게 됐는지?

안녕하세요? 신라시대의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이 되어서 집권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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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덕여왕의 즉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평왕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입니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란 호를 올렸다고 합니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덕여왕은 성골이라는 이유로 여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이는 성골 만이 왕이 될수 있었는데 부모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 한명만 왕족이면 진골입니다.

    진평왕이 죽고 난 후 남아있던 성골은 덕만공주와 사촌동생인 승만공주뿐이었는데, 이에 신라의 귀족들은 회의를 해 남자가 꼭 왕을 해야한다는 주장보다 성골 출신이 꼭 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장녀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제27대 덕만(德曼)은 시호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고,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법흥왕 무렵부터 성골만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법흥 이후 직계후손으로 불리는 진흥·진지·진평으로 이어졌지만, 진평에게는 아들이 없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기회였는지 모른다. 성골 계승의 틀이 강력히 잡힌 상황인데다, 비록 아들이 아니었지만, 선덕은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그런 그에게 첫 여왕의 영예가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여왕으로서 받는 정치적인 위험성은 컸고, [화랑세기]에 따르면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강력한 신라로 가는 갈림길에 선 왕으로서 선덕은 어떤 고민을 하였고 어떤 왕정을 펼쳤을까.

    아직 위서(僞書)의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이 두 사람과 세 번 결혼했다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이란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형제이다.


    이들은 모두 25대 진지왕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죽고 사촌인 진평왕이 26대 왕으로 즉위한 뒤, 형인 용수는 진평의 딸 천명 공주와 일찌감치 결혼하였고, 용춘은 진평의 후계로 거의 결정된 다음의 선덕(덕만) 공주와 결혼하였다.


    사실 용수를 사위로 맞을 때 진평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었다. 그러나 선덕이 자라면서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녀’ 천명에게 용수가 왕에 오르는 것을 양보하라 명령하였던 것이다.


    용춘과 선덕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용춘은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 진평왕은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라고 하였다. 이미 천명과 결혼했는데도 말이다. 선덕의 두 번째 결혼이다. 그러나 용수와의 사이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 사이에 용수는 죽으면서 첫 부인 곧 천명 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부탁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춘추이다. 선덕은 왕으로 즉위하자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도합 세 번째, 같은 사람과는 두 번째 결혼이다.

    그런데도 아이가 없어 용춘은 다시 한 번 스스로 물러났는데, 그 뒤 선덕이 다시 결혼을 했는지는 [화랑세기]에도 기록이 없다. 비록 용봉과 천일 같은 여자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지만, 평범한 결혼 생활은 못했던 것 같다.

    성골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성골로만 왕위를 이어야 한다.’라는 강력한 분위기가 신라 왕실의 첫 여왕을 탄생시켰음은 분명하다. 누가 성골인지 왕실 안의 그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선덕은 [화랑세기]가 표현한 대로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녔고, [삼국사기]에서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한 이였다. 나라 사람들은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까지 했다. 시대의 분위기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을 두루 갖춰 기회를 잡은 셈이다.


    사실 여성으로 왕이 된 다음 선덕의 앞길이 평탄하지만 않았다. 왕이 된 지 11년 곧 642년에 백제와 벌인 대야성 싸움은 위기 중의 위기를 불러들였다. 이 전쟁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 죽는다. 상대가 의자왕이었다.


    급기야 선덕왕은 다음 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바, 당 태종은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에는 “여왕이 재위하고 있으므로 이웃나라가 깔본다. 내 종친 한 사람을 보내 국왕을 삼고 군대를 파견하겠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사신은 신라 국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비담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이 15년, 하지만 이듬해 믿었던 상대등이 도리어 모반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선덕은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선덕은 지혜의 여왕이었다. 선덕의 그 같은 장점을 가장 부각시킨 사람이 일연(一然)이었다. 일연은 그의 [삼국유사]에서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라는 제목을 달아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제목은 ‘선덕왕이 기미를 알아차린 세 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첫 번째가 모란 이야기이다. 당 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석 되 보내주었다.


    선덕이 그림을 보더니,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했고, 뜰에 씨앗을 심어 꽃이 피고 열매 맺기까지 기다리자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다만 선덕이 아직 공주로 있을 때라고 못 박은 점이 다르다. 627년에서 631년 사이의 일이다.


    두 번째는 옥문지(玉門池) 사건이다.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 한 떼의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우는 것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스레 여겨 왕에게 여쭈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잘 훈련받은 병사 2천 명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가라. 여근곡(女根谷)을 물어, 거기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여라.”라고 명령하였다.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 명이 거기 와서 숨어 있었다. 모두 잡아 죽였다.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선덕왕 5년(636년)의 일로 기록되었다.


    선덕은 이런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모란의 경우,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대개 여자가 지극히 어여쁘면 남자가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나비와 벌이 따르는 까닭’이라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향기가 없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까닭을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일반화시킨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에서 선덕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더욱 개인화해서 해석했다. 후자가 왠지 더 극적이다.

    출처 : 인물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