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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7.18

선덕여왕이 왕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시대에 최초로 여자가 왕이 되었던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이 될수 있었죠? 그 당시엔 남자들만 왕이 되거나 후계자가 되던 시대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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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에 따르면 신라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지오. 부모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 한 명만 왕족이면 '진골'이라고 했는데

    진평왕이 죽고 난 후 남아있던 성골은 덕만공주(선덕여왕)와 사촌동생인 승만공주(진덕여왕) 뿐이었습니다. 이에 신라의 귀족들은 회의를 하였고 남자가 꼭 왕을 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성골 출신이 꼭 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덕만공주(선덕여왕)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26대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로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인물입니다. 아버지인 동륜이 사고로 죽자 작은 아버지가 25대 진지왕이 되었으나 화백회의 만장일치로 폐위되어 진평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은 성골출신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딸인 27대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성골 출신만 왕이 될수있었는데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큰 딸인 덕만이 여왕이 될수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양에만 여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세 명의 여왕이 있다. 선덕 여왕, 진덕 여왕, 진성 여왕인데 모두 신라의 왕이다. 왜 신라에만 독특하게 여왕이 있었을까?


    바로 신라만이 가지고 있던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 때문이다. 골품제에서는 특별하게 한정된 신분만이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신분이 여자만 남게 되면 여자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덕 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 최초로 여왕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왕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 동생이나 사위가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딸이 왕위에 오른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왕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똑똑한 큰딸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물론 덕만은 성골이었으므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귀족과 관리들은 덕만이 여성이라는 점을 들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평왕이 결국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보아 진평왕의 권력이 그만큼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선덕 여왕은 여왕답게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황룡사 대탑과 첨성대 등을 세우고, 분황사를 건립하는 등 신라의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고 애썼다.

    출처 : 한국사 개념사전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 당시 신라는 골품제가 있었습니다. 이 골품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골과 품으로 등급을 나눴습니다. 구체적으로 골은 성골과 진골이 있고, 품은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있습니다.

    그 당시 진평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덕여왕은 성골 출신입니다. 그래서 성골 여자로서 왕이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중고기의 왕위가 반드시 왕의 아들로 계승된 것은 아니어서, 여왕 탄생의 이유로는 불충분하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웠다’고 다른 이유를 전하고 있다. 당시 진평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이들에게도 자식은 국반의 딸인 승만(勝曼, 진덕여왕) 밖에 없었다. 진평왕의 가계에 성골 신분을 가진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성골 신분으로서 여성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