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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7

한산이씨의 시조인 이색은 누구인가요?

한산이씨의 시조인 목은 이색은

어느 시대에의 사람이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그 생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는지도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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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목은 이색(1328년~1396년)은 고려후기의 인물로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라고 합니다.

    본관은 한산(충남 서천)이라고 합니다.

    제과에 합격한 뒤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한산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빛나라하리
    빛나라하리23.06.09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색 > 1328년 충숙왕(15) ~ 1396 태조 (5)은 고려말의 문신.학자 입니다. 호는 목이고 , 자는 영숙 입니다. 이곡의 아버지 이기도 합니다. 고려말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 이기도 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대한민국의 한의사 이며, 전통 한의학을 연구하고 개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업적은 동국통감 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했다는 것과. 동국여지승람 이라는 지리서를 저술 했다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41년(충혜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 4) 3월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1351년(충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습니다. 1352년(공민 1) 4월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습니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습니다.


    제과에 합격한 뒤 곧 귀국길에 올라 한산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12월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典理正郎)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 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윤정월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승진했습니다. 같은 해 3월 사은사 윤지표(尹之彪)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1356년(공민 6) 1월 고려로 돌아와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吏部侍郎)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겸병부낭중(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1357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 7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듬해 7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한림학사가 되고, 1360년(공민 9) 3월 추밀원좌부승선 지예부사(知禮部事)에 이르렀습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였습니다. 이후 좌승선(左承宣) · 지병부사(知兵部事) · 우대언(右代言) · 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 ·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 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습니다. 1362년(공민 11)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임명되었고, 고려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승진하였으며,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에 봉해졌습니다. 1363년 윤3월에는 1361년의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1365년 3월 첨서밀직사사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윤10월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예부시를 주관하였습니다.


    1365년부터 시작된 신돈집권기 동안 그는 1367년 5월 중영(重營)된 성균관의 교육 부흥과 관련하여 12월 판개성부사로서 겸 성균대사성(兼 成均大司成)에 임명되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김구용(金九容) · 정몽주(鄭夢周) · 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 · 정주학 · 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같은 달에 원으로부터 정동행성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삼사좌사, 삼사우사를 거친 후 이듬해 4월 친시(親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된 것을 시작으로 1369년 6월과 1371년 3월 예부시의 시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371년(공민 20) 5월 지춘추관사로서 감춘추관사인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增修)하였으며, 7월 신돈 축출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에 봉해졌지만, 모친상을 당해 9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기복(起復)되었으나 곧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여 1373년(공민 22) 11월 면직되면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습니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습니다.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습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습니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습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습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습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 · 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습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원 · 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 · 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 · 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습니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 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 · 하륜(河崙) · 윤소종(尹紹宗) · 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색-정몽주 ·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 · 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2]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3]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4]와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가 지은 ‘가정집’에 ‘차마설(借馬說·말을 빌려타는 것)’을 쓴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이 유력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북 영덕의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이색은 외가인 이곳 영덕의 괴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원의 벼슬은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에 오르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정했다. 이색 이후 호장공계의 한산이씨는 조선조에서 유력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가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