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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05.30

임오군란 때 도시하층민도 합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임오군란은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라 알고 있는데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 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빈민층도 합세했다고 합니다

군의 차별로 일어난 사건인데

빈민층도 합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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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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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7월 19일부터(양력, 이하 양력 표시) 7월 24일까지 서울의 하급군관들과 도시빈민들이 개항 이후 시행된 개화정책과 집권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임오군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19세기 말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 중국이 1840년(헌종 6)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중화체제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국제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은 1873년(고종 10) 11월에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주관하였고 고종의 비인 왕후 민씨(명성 황후)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조선보다 먼저 국제질서에 포섭된 일본은 정한론을 앞세워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1876년(고종 13) 조선에〈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강요하였다.

    문호 개방 후 조선은 보수관료와 유생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조선은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우선 개항 직후 1876년(고종 13)에 일본에 김기수(金綺秀) 일행을 수신사(修信使)로 파견하였고 1880년(고종 17)에는 김홍집을 2차 수신사로 파견하였다. 수신사 일생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변화한 모습과 앞으로 조선이 서양 각국과 맺을 수교에 대비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를 통해 개화정책의 중심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으며 군비 강화를 위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두었다. 1881년(고종 18)에는 조사시찰단을 만들어 일본 정부의 운영과 조직에 관하여 시찰하였다. 청은 김윤식을 영선사로 파견하여 텐진의 기기국(機器局)에서 무기제조술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은 물론이고 개화정책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도 생겨났다. 개항 이후 단기적으로 이득을 본 자들은 서울의 관료층과 상인들이었다. 개항장을 통해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쌀값이 폭등하여 서울 하층민의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서 쌀값이 크게 올랐고 이로 인한 서민들의 생활고는 극심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고종 19)에 쌀값은 개항 당시인 1876년에 비해 2~3배 상승했을 정도였다.

    구식군인들도 극심한 생활고로 정부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1881년(고종 18) 4월에 군제개혁을 단행해 기존 중앙군인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축소하였고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일본공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일본식 군사훈련을 하였다. 창설 초기에는 5영의 군인 중에서 80명을 차출하였으나 후에는 상류층 자제 100명으로 구성하였다. 군제개혁에 따라 5군영의 상당수 군인들이 실직하였으며 남은 군인들도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낮은 대우를 받았다. 종래 5군영 소속의 구식군인들은 근대적인 개혁으로 자신들의 처지가 악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란 직전에 구식군인들은 13개월 치나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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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유층이 세금을 다 쓰면서 별기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세금을 더 내게 만들면 하층민이 굉장히 화가납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으로 쌀마저 일본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분노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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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배경은 정부의 개화 정책, 일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불만, 구식 군인들을 차별로 시작되었습니다.

    개화정책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서 국가 재정도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 쌀값 폭등과 흉작으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던 백성들, 즉 도시하층민입니다

    이들은 결국 개화정책을 주도한 민씨 일가에게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키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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