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임오군란이 발생했던 원인이 구식군인을 차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요?
조선후기 1800년대말 임오군란이 발생했던 원인이 구식군인들을 차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정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주1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주2의 반발이 격화되었습니다.
특히, 5영을 폐지한 후 무위· 장어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주3과 이재선 · 안기영 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을 계기로, 민씨척족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 수 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 문제에 있었습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 구 5영소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불만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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