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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22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여름에 얼음이 있었나요

현대 요즘은 누구나 에어컨 에어컨이나 냉장고를 통해서 쉽게 얼음을 얻을 수 있는데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여름에 얼음을 얻을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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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빙고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 합니다.

    얼음을 보관해서 여름에 사용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얼음 창고를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 11년(505) 때 얼음 창고를 만든 기록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에도 정종, 문종 때 얼음을 나누어주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얼음을 저장했을 석빙고 유구는 지금까지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습니다. 위의 사진의 경주 석빙고는 그 위치는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에 있긴 하지만, 경주 석빙고 자체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된 것으로 석빙고 중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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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때는 겨울때 호수가서 얼음을 캐가지고 서빙고에다가 저장하여 여름까지 시원하게 먹었답니다

    주로 왕실또는 양반집에서 먹거나 특별한행사때는 백성들한데 나누어 줬지요 그렇다보니 일단 양반집 대가에서는 개인으로 채취해서 보관하여 먹은기록도있습니다

    그저장소가 바로 서빙고인데여 오늘날에 용산구 서빙고동이라고 있습니다

    서빙고동은 얼음저장소라 해서 한강에 얼음을 캐고 가까운곳에보관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역사는 아직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기에 냉동창고가 많았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영화 보시면은 아주 자세하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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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시대 빙고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를 관장하던 관청을 빙고전(氷庫典)이라고 불렀습니다. 빙고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늦어도 6세기 전반에는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505년(지지왕 6) 11월에 왕명으로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6세기경에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시대에도 이런 용도의 빙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주 석빙고,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얼음을 얻기 위해 "빙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빙상은 겨울철에 얼어붙은 강이나 연못의 물을 얼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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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얼음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는 한겨울에 강이나 개울에서

    체취한 얼음을 온도유지가 가능한

    지하 석빙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꺼내어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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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조상들이 지혜가 뛰어나 겨울에 얼음을 구해서 저장창고에 넣었다가 여름에 꺼내어 썼습니다,

    시대별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시대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고 지증왕 6년(505)에 얼음을 보관하도록 명령 내림


    고려

    평양에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고 있었응. 고려 문종 때부터 해마다 음력 6월부터 입추(立秋)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에게는 3일에 한 번, 고급 관리들에게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제도로 삼았응


    조선

    수도인 한양에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고 창덕궁에도 내빙고라는 얼음 창고를 따로 두어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 동빙고에 있는 얼음은 왕실에서 제사 음식을 신선하게 올리는 데 썼고,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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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주에는 삼국시대부터 석빙고(石氷庫)가 있었다. 지금의 석빙고는 입구에 “숭정 기원후 재신유 8월 이기개축(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1741년(영조 17)에 이곳을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주조는 마치 고분과 같다. 화강암으로 안팎 두 방을 만들어 바깥방에는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복사열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천장의 흙 두께를 알맞게 하였다. 매우 과학적이다.


    고려시대에도 빙고의 제도가 이어졌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의하면 빙고를 열 때는 돼지 한 마리를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 얼음은 높은 벼슬에 있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036년(정종 2) 17명의 신하들에게 10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최이(崔怡)가 강화도 이서산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빙고를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한없이 괴로워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빙고의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개성 또는 그 부근의 강변 가까이에 저장해두거나 보다 추운 북쪽 지방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철에 운반하여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태(李圭泰)의 설에 의하면 보다 기온이 낮은 평양에 빙고를 두고 발이 빠른 장사를 시켜서 서울인 개성까지 날마다 운반하여 먹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개성까지 나르는데 3척입방의 얼음을 나른다. 개성에 도착하였을 때에 얼음이 1척입방보다 더 녹아서 줄어들면 볼기를 맞고 옥살이를 해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빙고의 제도는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얼음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타난다. 1398년(태조 7)에 얼음을 저장하였다. 1449년(세종 31)에는 사대부의 시제(時祭)에 얼음을 내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당상관(堂上官)의 집에 얼음을 고루 내리도록 하였다.

    1454년(단종 2)에는 얼음저장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456년(세조 2)에는 해마다 70세 이상의 당상관에 얼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1470년(성종 1)에는 절의 공양에는 동빙고의 얼음을 사용하게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예조에서 얼음을 더 많이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궁중에서 쪽물염색에 얼음을 쓰기 때문에 허가하지 않았다. 1546년(명종 1)에는 문소전(文昭殿)에 빙반(氷盤)을 배설하여 실내를 써늘하게 하였다. 1768년에는 산릉(山陵)의 제사에는 얼음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강변에 동서 두 빙고를 두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동고는 ○개(豆毛浦 모두포: 지금의 옥수동)에 있다. 제사용 얼음만 진공하고, 서고는 둔지산(屯智山: 지금의 서빙고국민학교 근처)에 있다. 궁중의 부엌과 백관(百官) 등에 공급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746년에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동빙고의 얼음은 제사에만 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1470년에는 부처를 공양하는 데에 동빙고의 얼음을 쓰라고 하였다.


    『용재총화(悀齋叢話)』에서는 “중랑천(지금의 청계천)의 더러운 물을 피하여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의 강물이 4치쯤 얼었을 때에 잘라 낸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동빙고는 연산군 때 사냥터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빙고 동쪽으로 이전하니 사실상 서빙고에 통합되고 말았다. 서빙고는 1898년까지 존속되었다.


    『한경지략』에서 말하기를 “해마다 섣달에 사한제(司寒祭)를 올리고 한강의 얼음을 깨어다가 보관하였다. 춘분에 개빙제(開氷祭)를 올리고 얼음을 진공한다. 또, 내빙고(內氷庫)가 있어서 어공(御共)만 전문으로 맡아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얼음공급의 시기·양·대상인물 등에 관한 규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빙고 속의 얼음은 계절이나 보관법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얼음은 막대한 양이었고, 이것을 녹지 않게 보관하기 위한 백성들의 부역이 가혹하였다. 그래서 빙고의 얼음을 누빙(漏氷)이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용재총화』에는 “얼음을 채취하는 데에 많은 군인이 동원된다. 빙고의 얼음을 꺼낸 뒤 8월에 군인들을 빙고에 보내어 빙고 내부를 수리한다. 겨울철에는 칡줄기를 얼음 위에 깔아 미끌어지지 않게 한다.


    강가에 장작불을 피우고 의약을 준비하여 얼음을 넣을 준비를 한다. 또,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서 빙고의 아래위와 사방을 덮도록 한다. 그러면 얼음이 잘 녹지 않는다.


    그런데 빙고관리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일을 아전들에 맡기더니 계축년에 얼음저장이 소루하여 파면되었다. 갑인년에 관리들은 성의를 다 하였다. 그래서 을묘년에는 나라의 대상(大喪)과 사신들에 대한 잔치에 얼음이 부족하지 않았고 가을에도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빙고는 경주의 석빙고 외에도 경상남도의 창녕, 경상북도의 성주·안동·현풍·청도, 황해도의 해주 등지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빙계동,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 등과 같이 여름철에도 고드름이 달리는 빙혈이 도처에 있다. 그래서 빙고 이상의 냉장·냉동의 구실을 하고 있다.


    얼음은 냉장·냉음료·실내냉장·치레 등 가지가지 용도가 있다. 1881년(고종 18)의 <동궁마마 가례시 기명발기>에 얼음전용의 빙도(氷刀)가 나온다. 그리고 김칫독을 얼음이 들어 있는 궤 속에 넣어 저장하는 저빙궤(菹氷櫃)가 나온다.


    얼음은 1910년에 부산수산시장에서 비로소 인조제빙을 시작하였다. 얼음에 소금을 섞어서 -20℃까지 냉각하여 아이스케이크 등을 만들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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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강물이 두껍게 어는 추운 12월 경 직접 채빙을 한 후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까지 얼음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 얼음창소는 빙고 라고 부릅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빙고는 동빙고, 서빙고가 있습니다.

    고려때엔 평양에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가 내빙고, 외빙고가 있었으며, 고려 문종때부터 해마다 음력 6월부터 입추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에게 3일에 한번, 고급관리들에게는 7일에 한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제도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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