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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8.23

연려실기술은 어떤 책인지 알려주세요.

'문정왕후가 경빈 박씨에게 죄를 씌워 그 아들까지 죽음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히 여겼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 연려실기술은 어떤 책인가요?

실록은 아니고 야사인데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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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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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려실기술이 어떤 책인지가 궁금하군요.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조선시대의 정치 · 사회 · 문화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입니다.

    이 책은 편저자 이긍익의 생존 때부터 전사본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히 정본이 없이 전해져왔습니다.

    더구나 편저자 자신이 그 범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문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는 대로 수시로 기입, 보충하는 방법을 취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충하게 하여 정본을 이룩하도록 희망하였으므로 종래의 전사본 중에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또, 편저자 자신의 최후 정본인 원고본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 정본이 어떤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가장 권위 있고 정본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1913년 일본인 주관의 조선고서간행회 인본의 대본이고, 다른 하나는 1911년최남선이 주관한 광문회 인본의 대본입니다.

    전자는 원집 33권(태조∼현종), 속집 7권(숙종), 별집 19권, 합 59권임에 대하여, 후자는 단지 원집 24권(태조∼인조), 별집 10권, 합 34권뿐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찬술연대는 저자의 연보가 구체적으로 전해오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으나, 41세 되던 1776년(영조 52) 이전에 일단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 인용된 조선시대의 야사·일기·문집류는 400여 종에 이릅니다. 주로 인용된 서책은 ≪고려사≫·≪국조보감≫·≪동국통감≫·≪삼국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류보다는 ≪동각잡기 ≫·≪기재잡기 ≫·≪식소록 ≫·≪해동잡록 ≫ 등의 야사류가 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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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필사본. 59권 42책.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원집(原集) 33권, 속집(續集) 7권, 별집(別集) 19권 등 3편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원집에 태조 이래 현종까지의 283년간(1392∼1674) 각 왕대의 주요한 사건을 사의(私意)를 가하지 않고,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서 적어 나갔고,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 ·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속집은 숙종조(肅宗朝) 47년간(1674∼1720)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적었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역대관직(歷代官職)을 비롯하여 각종 전례(典禮) ·문예(文藝) ·천문 ·지리 ·변위(邊圍) ·역대 고전 등 항목별로 그 연혁을 수록하고 역시 인용한 책 이름을 부기하였다.

    저자가 생존시부터 원집과 별집의 전사본(轉寫本)이 널리 퍼져 정본(正本)이 없으므로, 저자는 본문에 여백을 두고 그때그때 새로운 사실을 덧붙여 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조선시대 사서(史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저작인 이 저서는 객관적인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기록되었다는 점과 사견(私見)이 조금도 가해지지 않은 명석(明晳)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공정한 필치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가히 역사서의 백미편(白眉篇)이라 할 수 있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도합 34권으로, 1913년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도합 59권으로 각각 간행하였고, 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의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제1집으로 도합 12권으로 발행하였다.

    네이버에서 인용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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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 가장 유명했던 역사서로 국가에서 주관한 정사가 아니라 개인이 저술한 역사서이지만 자료 수집에 매우 공을 들이고 최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에도 신경쓴 사서이므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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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쓴 야사입니다. 이 책은 1806년에 완성되었으며, 조선 태조부터 현종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실록과는 달리, 주관적인 기록과 설화, 전설 등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은 조선 중기의 사회, 문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문정왕후가 경빈 박씨에게 죄를 씌워 그 아들까지 죽음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히 여겼다"는 내용은,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목왕후의 아들인 인조를 세우기 위해 경빈 박씨를 죽인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중기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연려실기술은 조선 중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은 실록과는 달리, 주관적인 기록과 설화, 전설 등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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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그의 아버지 이광사가 유배되었던 곳인 신지도에서 42세 때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에 걸쳐 편찬한 조선시대 야사의 총서입니다. 던 조선시대에 개인이 당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이런 현실에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연려실기술'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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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필사본. 59권 42책.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원집(原集) 33권, 속집(續集) 7권, 별집(別集) 19권 등 3편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원집에 태조 이래 현종까지의 283년간(1392∼1674) 각 왕대의 주요한 사건을 사의(私意)를 가하지 않고,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서 적어 나갔고,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문신(文臣)·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속집은 숙종조(肅宗朝) 47년간(1674∼1720)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적었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역대관직(歷代官職)을 비롯하여 각종 전례(典禮)·문예(文藝)·천문·지리·변위(邊圍)·역대 고전 등 항목별로 그 연혁을 수록하고 역시 인용한 책 이름을 부기하였다.

    저자가 생존시부터 원집과 별집의 전사본(轉寫本)이 널리 퍼져 정본(正本)이 없으므로, 저자는 본문에 여백을 두고 그때그때 새로운 사실을 덧붙여 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조선시대 사서(史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저작인 이 저서는 객관적인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기록되었다는 점과 사견(私見)이 조금도 가해지지 않은 명석(明晳)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공정한 필치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가히 역사서의 백미편(白眉篇)이라 할 수 있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도합 34권으로, 1913년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도합 59권으로 각각 간행하였고, 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의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제1집으로 도합 12권으로 발행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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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서의 ‘야사(野史)’ 개념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지방관에 의해 편찬된 지방사”를 의미했지만 16세기 이후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그 의미가 점차 변화했는데 그 시대적 배경으로는,

    ① 관료의 입장에서 정무 수행과 정책 결정에 참고할 만한 국조고사(國朝故事)에 대한 자료가 필요했고,

    ② ‘조선’이 장기 존속하면서 왕조사의 총괄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는 ‘정사(正史)’ 편찬의 기회가 거의 없어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조선시대 정치사에 대한 개설서가 필요했으며,

    ③ 18세기 ‘실학(實學)’의 대두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

    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야사’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점차 변화했는데 16세기에는,


    ①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와 달리 재야의 사림이 직접 견문한 것을 기록한 소설ㆍ수필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18세기(영ㆍ정조) 이후 통사(通史)ㆍ총서(叢書) 형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② <실록(實錄)>ㆍ<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관찬(官撰) 사서와 대칭되는 개념,

    ③ 사대부ㆍ퇴직 관료의 사찬(私撰) 사서인 동시에 수필ㆍ소설ㆍ잡사(雜史) 종류를 포괄하는 개념

    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조선 시대 야사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체재(體裁)를 살펴보면 크게 “야사의 집성(叢書)을 통한 역사서의 편찬(通史)”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야사들을 모아 일정한 기준 아래 그 자료들을 배열해 하나의 역사서로 편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를 따르고 있는데, 기존의 야사류가 채택한 편찬 체재를 비판하고 그 사건의 인과관계를 확실히 밝히기 위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이긍익은 크게 4가지 기준 아래 <연려실기술>을 편찬했는데 그 4가지 기준은,

    ① 술이부작(述而不作) : 기록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

    ② 거실수록(據實收錄) : 사실에 근거해 기사(記事)를 수록한다.

    ③ 직서(直書) : 수록된 인물의 호(號)ㆍ자(字) 대신에 실제 이름을 기록한다.

    ④ 전거제시(典據提示) : 인용된 각 항목마다 그 출전(出典)을 명시한다.

    입니다. 게다가 <연려실기술>은 전체적으로는 기사본말체이면서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 역사서 편찬의 기본인 기전체(紀傳體)의 요소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읽는 독자들도 이 책의 내용 수정ㆍ편집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등, 야사를 집성한 '총서'이면서 이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역사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정만조(鄭萬祚), 1994, <練藜室記述의 編纂體裁에 대한 再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질문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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