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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의 왕안석은 어떠한 인물입니까?

중국 역사 중 비교적 덜 알려진 나라가 송나라인데요.. 그런 송나라에서 왕안석이란 사람이 자주 언급되는 데 중국 송나라의 왕안석은 어떠한 인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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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나라의 왕안석은 기득권층보다는 국가와 일반 서민층에 유리한 개혁정책을 주로 연구했던 개혁가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안석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중국 북송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서

    1069~1076년에 신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세종은 왕안석을 가리켜 “재주는 많지만, 소인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한편, 정조는 주자학의 공식대로 왕안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시행한 신법이 어찌 모두 잘못이었겠는가? 좋은 제도도 많은 것을 훗날 모두 폐지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언급을 덧붙였습니다. 왕안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교 문화권에서 살던 전근대 동아시아인의 난제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안석이라는 인물은 한자는 王安石이라고 하며 1021년 12월18일생으로 송나라에서 활동했던 시인이자 개혁 정치가인 인물이었습니다. 자는 개보이고 호는 반산으로 당시 장시성 동샹구 출신으로 북송이던 시기에 시인 문필가로 매우 활약했다고 합니다.

    당시 왕안적은 정치적으로도 스타같은 인물이었는데 친거민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마는데 이후 중국 역사상으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불리기도 또는 백성의 적이기도 불리우며 논쟁적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송나라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자는 개보, 호는 반산(半山)이고,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북송의 6대 황제인 신종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 모역법, 시역법, 보갑법, 보마법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안석(王安石)

    중국 (宋, 960∼1279)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北宋)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장시성[江西省] 푸저우[撫州] 린촨현[臨川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다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진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지방관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왕안석(王安石)은 열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南京)에 정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으며, 유가 경전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의서(醫書), 소설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인 1042년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20년 정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급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개 사업과 재정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문과 행정 능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 받기도 하였지만, 왕안석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에 왕안석은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정치의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주례(周禮)>를 전범(典範)으로 한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 양성과 선발, 이재(理財)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에서도 모범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67년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뒤를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황위(皇位)에 오른 신종(神宗)은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곧바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그리고 1069년에는 그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신법(新法)을 입안하여 개혁 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新法)을 추진하였으며, 107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으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왕안석은 1069년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신법(新法)을 잇달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대지주와 대상인, 고리대업자들과 정부 안의 보수파의 반발에 부닥쳤다. 1074년 심한 기근마저 나타나 반발이 커지자 신종은 왕안석을 강령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좌천하여 이를 무마하려 하였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을 잃는 일까지 일어나자 1076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녕부(江寧府)로 은거하였다. 그는 1086년 5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죽은 뒤 형국공(荆国公)으로 봉해졌다.

    왕안석은 유학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을 강조하였으며,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유학의 도덕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때문에 왕안석의 사상은 유교 전통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의도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정론(政論)과 여행수기,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문은 현실주의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晩年)에는 한자(漢字)의 연원과 제자(製字) 원리 등을 연구하여 <자설(字說)>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遗)> 등의 문집(文集)이 전해진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북송의 6대 황제인 신종(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 모역법, 시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나라 무주(撫州) 임천(臨川) 사람. 신법당(新法黨)의 영수로, 자는 개보(介甫)고, 소자(小字)는 환랑(獾郞)이며, 호는 반산(半山)이다. 왕익(王益)의 아들이다. 인종(仁宗) 경력(慶曆) 2년(1042) 진사(進士)가 되어 첨서회남판관(簽書淮南判官)이 되었다. 7년(1047) 은현지현(鄞縣知縣)이 되어 수리시설을 개선하고 주민들에게 양곡을 대여하면서 행정제도를 엄수하여 빛나는 치적을 쌓았다. 서주통판(徐州通判)과 상주지주(常州知州)를 역임했다. 그렇게 강남지역의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가우(嘉祐) 3년(1058) 입조하여 삼사탁지판관(三司度支判官)이 되었는데, 1만 언(言)에 이르는 글을 올려 변법개혁(變法改革)과 인재의 양성을 주장했지만 채택되지는 못했다. 지제고(知制誥)로 옮겼다가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했다.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강녕부(江寧府)를 맡았다가 얼마 뒤 불려 한림학사겸시강(翰林學士兼侍講)이 되었다.


    휘녕(熙寧) 2년(1069)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변법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신종의 뜻과 일치해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삼사조례사(三司條例司)를 설치해 재정과 군사 제도를 정비하면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안을 모색했다. 청묘법(靑苗法)과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했다. 다음 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과거(科擧)와 학교 제도를 개혁했다. 7년(1074) 사마광(司馬光)과 문언박(文彦博), 한기(韓琦)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재상 자리를 사직하고 강녕부로 옮겼다. 다음 해 다시 복직했지만, 다음 해 다시 파직되어 강녕부로 나갔다.


    원풍(元豊) 3년(1080)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文)이다. 그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국가행정의 효율성 증대 등에서 일정한 실적을 거두었지만 원래 취지인 농민과 상인의 구제라는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세역(稅役)의 증대, 화폐경제의 강요 등으로 영세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문제점도 있었다. 저서에 『왕임천선생집(王臨川先生集)』과 『주관신의(周官新義)』, 『상서신의(尙書新義)』, 『시경신의(詩經新義)』, 『시의구침(詩義鉤沈)』, 『도덕경주(道德經注)』 등이 있다.

    출처 : 중국역대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