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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해사이에 방황하는 토끼
달과 해사이에 방황하는 토끼23.12.29

조선초기 유교와 후기의 유교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숭유배불을 기치로 창건된 조선은 초기에는 실생활에도 도움이 많고 유용하였으나 중기를 거쳐 후기로 오면 다양한 폐해가 나타나는 이유는 왜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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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시대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을 방법을 놓고 급진과 온건파 신진사대부로 분열되고, 급진파가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건국에 참여한 급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니다. 이들을 계승한 관학파는 성리학 이외의 과학, 농학 등 실용적 학문에 대해서도 제도 정비에 필요에 따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손인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대의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만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의 기념 이념인 이기론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활발했습니다. 17세기 이들을 계승한 세력은 예학과 보학으로 확대합니다. 또한 양난 이후 성리학이 사회, 경제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집권 세력은 그들의 지배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리학을 절대시, 교조화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새 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두갈래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장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정치 경제에 보다 관심을 지닌 관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경학을 중시하여 유교의 기본 이념에 충실한 사학파 학풍이었습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하면서 신진 사대부들은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 도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국을 이루고자 한 정도전 등의 관학파가 주도하였습니다. 관학파는 세조의 왕위찬탈로 일부는 낙향하고 일부가 훈구파가 됩니다. 이후 성종 때 낙향했던 인사들을 등용하는데 이들이 사학파 또는 사림파라고 불립니다. 사림파들은 예를 중시하는 사람들로 낙향하여 때를 기다려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한 것입니다. 이후 사화-붕당-예송논쟁-환국정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