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 건국 후 신진 사대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하는데, 고려 때까지만 해도 불교를 숭상했다가 중국에서 생겨난 사상인 유교를 숭상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건국의 주축 세력인 신진 사대부는 명으로부터 건너 온 주자학, 즉 성리학자였습니다.
태조인 이성계는 고려의 무인이었으나 고려의 무인정권으로 인한 폐해가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고, 정도전을 필두로 한 성리학 세력의 지지를 받아 그들이 계획한 국가 건립을 추진하였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정의 운영은 무인보다는 문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건국 후 완벽히 성리학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 신진사대부들은 명을 상국으로 받들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상을 들여오면서 과거 고려시대의 국교였던 불교와의 대립이 자명하였습니다. 이에 과거 고려시대의 불교가 너무 비대해지면서 국고를 많이 낭비하여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고, 종교를 넘어 권력으로 자리잡아 민간에도 피해를 끼졌다고 보며, 더이상 불교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사찰 등의 숫자를 줄이고 승려가 가질 수 있는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불교를 억압하는 대신 유교를 모든 국가 운영의 맨앞에 내세우는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조선은 고려와 달라야했기에 태조 이성계에 이은 그 이후 왕들도 왕가에서 불교에 심취한 왕과 왕족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국가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여 불교와 유교가 충돌이 나게 된다면 왕족 외 국정운영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인해 또다시 국가가 혼란이 올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으나 학자들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반 또한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불교가 왕권과 유착하여 종교 이상의 권력을 가지다 보니 이에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왕도 더러 발생하였고, 조선 왕조에서는 그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신진사대부들의 전략이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주자학의 인의예지신의 좋은 뜻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쪽으로만 흘렀고, 이후 자신들만 관직을 독점하며, 당파 등 패거리정치를 하게 되고, 상인 계급 등을 천시하며, 일반 민중에게 무리한 관혼상제를 강요하는 등 폐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이유로 유교 만을 숭상했던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육아·아동전문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고려후기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된 성리학을 수용한 이들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급진사대부로 조선개창의 주역이 되었고 고려왕조를 지속하길 바랐던 온건사대부들도 낙향했다 후학을 양성해 훗날 사림파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지요. 이들이 철저히 성리학적인 나라를 만들려는 것은 그들의 사상 뿐 아니라 고려 불교의 타락과 부패상을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사원은 왕실 및 귀족들로부터 받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이자, 많은 소작인과 노비를 두고 대농장을 경영하고 이뿐만 아니라 상업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술을 만들어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들의 농민수탈은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켰는데 고려말 농민은 소작료와 세금을 이중삼중으로 내야하는 지경이었는데,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 및 대농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모순을혁파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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