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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01

몽고와 전투에서 승리한 처인성 전투는 오늘 날의 어디에 해당하는 지역입니까

당시 세계 최강 있던 몽골군에 고려가 승리한 몇 군데 중에 하나인 처인성 전투는 오늘날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 곳입니까 그리고 처인성은 성의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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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 정부가 적극적인 방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자신들의 안전만을 도모한 반면. 농민과 천민들은 항몽세력의 주체였다.

    개전 초기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소위 초적(草賊)의 활동이다. 초적이란, 국내 통치 계급의 학정에 반대하여 궐기한 농민 반란의 폭동군들인데, 외적이 침입해 오자 이들은 솔선하여 일선의 선두에서 싸웠다.

    몽고군의 침략이 개시되자 평북 귀주 부근의 마산 초적들이 관군에 가세하여 황해도 황주 부근의 동선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광주(廣州)의 관악산 초적들도 정부군과 함께 몽고군을 막아 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초적과 함께 궐기하여 큰 전투적 위력을 발휘한 것이 노예, 부곡민 등의 천민들이었다.

    몽고군의 제 1차 침입시 충주성에는 충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양반 자제로 편성한 양반 별초와 노예들로 구성된 노군 잡류 별초(奴軍雜類別秒)라는 두 별초 부대를 조직하였는데, 막상 적이 쳐들어오자 지휘관과 양반 별초는 싸우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지만, 노군 잡류 별초들은 끝까지 남아 용감히 싸워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하였다.

    고종 19년 12월에 적장 살리타를 살해한 처인성의 전투도 주목된다. 처인(處仁)은 일반 양민들이 거주한던 군현이 아니라 천민이 살고있는 부곡이라는 특수 지역이었다.

    처인성 싸움에서 용전하여 침략군을 격퇴한 주체는 이 부곡에 살던 천민들이었다. 천민들은 고종 40년(1253) 몽고군의 제 5차 침입 때 충주성 전투에서도 침략군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충주성을 지키던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에서 부곡민들의 도움으로 적장 살리타를 살해한 명장이었다.
    그는 몽고군의 포위로 충주성 내의 식량 사정이 위급하자 예하의 병사들에게 "만일 힘을 다하여 잘 싸우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관노(官奴)의 명부를 불태워 그들의 신분 해방을 약속하고, 또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와 말을 관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관노들은 감격하여 용전 분투한 결과 침략군을 격퇴하고 끝까지 성을 사수하였다. 김윤후는 이 싸움의 공으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고, 나머지 군공이 있는 관노와 백정들에게도 관작이 주어졌다.

    충주의 피지배 백성들에게 잠재해 있는 항전의 의지를 신분 해방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여 분출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 싸움은 항몽전에서 일반 백성들의 역량이 과시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인성 전투에서 처인성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의 작은 성 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용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늘날 용인으로 알고있습니다.

    지금도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약 400m 정도의 성곽이 있습니다.


  • 고려시대 몽골의 제2차 침입(1232년)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승장(僧將) 김윤후가 정장 사르타이를 사살한 전투입니다.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의 소성(小城)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