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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캐슬23.06.11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요?

근대 인상주의 미술, 인상파 화가의 대표주자가 마네와 모네이잖아요, 그런데 마네와 모네는 같은 인상주의 화가이지만 화풍에서 차이가 좀있다고 들었는데요,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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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첫째, 두 사람은 빛에 대한 관심 정도가 달랐다.

    모네는 빛에 대한 인상을 시시각각 반영하여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렸다. 하루에 14점까지 그리기도 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1890년부터 연작을 그려낸다. ‘건초 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 수련 연못’ 등은 하루 빛의 변화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씨를 반영하며 빛을 탐구한 결과다.


    반면 인상주의 개척을 도운 ‘인상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는 그리는 순간의 빛의 상태를 반영하는 정도여서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리지는 않았다.


    둘째, 두 사람은 관심을 가진 대상이 달랐다. 모네는 실외 그림이었다. 산과 바다, 강, 정원, 들판 등 주로 자연이 소재였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꽃과 함께할 것이다.” “나에게 빛과 대지는 곧 끌림이자 회화의 모든 주제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리며 잠시 머문 도시 생활조차 힘들어했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이 가끔 등장했다. 드물게 마네의 작품과 비슷한 이름으로 모네는 ‘생라자르역(1877)’ ‘풀밭 위의 점심(1865~1866)’을 그렸다. 이 동명의 작품에서도 모네는 빛에 중점을 두어 풍경을 그릴뿐 인물의 표정 등에는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


    모네와 달리 마네의 관심사는 파리 도시의 변화와 도시에 살아가는 주변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연은 배경일 뿐이어서 대부분 실내에서 그렸다. 마네는 평생 파리 북서쪽에 살며 도시생활을 관찰했다.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조르주외젠 오스만이 현재의 파리 도시로 개발하는 것을 마네는 찬탄하며 바라보았다.


    19세기 후반 공원 음악회를 즐기는 도시인의 여가생활을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에, 피크닉을 즐기는 여가생활이 유행해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그렸다.


    그는 “루브르에 다녀오며 기관차에 올라보니 곁에 기관사와 소방관이 있었다. 이들은 삶은 고되지만 현대의 영웅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마네는 ‘생라자르역(1874)’을 그린다. 마네는 도시인의 삶을 반영하려 인물의 표정까지 애써 그렸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생라자르역’을 보면서 초상화인지 풍경화인지 혼란스러워했다.


    마네는 “나는 이 생활을 사랑한다. 살롱, 소음, 빛, 파티, 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말년에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라는 역작을 남긴다.


    셋째, 쓰는 색이 달랐다. 모네는 빛에 의한 색을 표현하다 보니 검은색을 거의 쓰지 않았고, 마네는 검은색을 즐겨 쓰는 편이었다. 그림자를 표현할 때도 모네는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마네는 검정색으로 표현하는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모네의 그림은 야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이해하기 쉽다.


    모네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다. 여신을 그린 신화와 역사화 흐름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태양 빛을 탐색한 업적을 남긴다. 모네와 우정을 나누며 많은 영향을 준 마네는 그가 살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화가였다. 그는 급진적인 미술가로 난해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에서 마네는 고전의 대표작을 차용하여 고전과 현대화의 차이점을 동시대에 명확히 알린 업적으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네와 마네 두 사람은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 세잔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현대미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