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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마더77
망고마더7723.12.21

강감찬 장군이 역사에 기록되는 주요 기록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고려 거란 전쟁이란 드라마릉 보며 궁금해 지는데 강감찬 장군이 이룬 주요 업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높이 평가 받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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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8년에 일어난 전투로 요나라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자, 강감찬은 상원수대장군으로서 20만 8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흥화진, 자주, 신은현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투는 귀주에서 벌어졌으며, 강감찬은 적의 후방을 공격하고, 고려군의 협공으로 요나라군을 완전히 섬멸했습니다. 이 전투로 요나라는 고려에 대한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화진 전투, 귀주대첩 등에서 고려군을 이끌어 거란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등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된 인물입니다. 거란은 목종에서 현종으로 왕을 교체한 강조정변으로 요의 성종이 침입한 2차 때는 현종을 설득하여 몽진을 통해 거란에 저항토록 하였고 이후 3차 침입(1018년) 때는 노장으로 전쟁을 직접 지휘하여 유명한 귀주대첩으로 거란 소배압이 이끈 10만 대군 중 2천7백명만 살아 돌아갈 정도로 큰 승리를 이끈 인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과 같은 경우에는

    문신 출심임에도 귀주대첩 등에서 승리를 하는 등

    당시 군사의 강국 요나라에게 승리함으로써 높게 평가받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시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원 급제 이후 고려사에 등장이 없다. 이는 환갑이면 이미 살만큼 살았다는 당시 수명 기준으로 굉장히 늦은 등장인데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리고, 3차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말년에도 문하시중의 직위와 후작위를 받으며 개성에 나성 건축을 주도하는 등 활약했다. 이미 생전에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위 관직, 후작이라는 사실상 왕족과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받을 수 있는 최고위 작위, 권력, 인망 등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일반적인 권신들과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냈으며 사후에도 구국의 영웅으로 배향을 받고, 고려 이후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낮아지지 않았으니 한국사에 손꼽히는 인생의 승리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 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