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 용난다 라는 말이 잇듯이 조선시대에서 노비가 높은직위까지 올라간 사례가잇엇나요?
1970년대부터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 잇습니다. 가난하더라도 서울대위치까지 올라가면 큰사람이 될수잇는 확률이 높앗던걸로 알고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서도 개천에 용난다라는 말이 어색하지않게 노비에서 큰 관직으로까지 올라간 사례가 잇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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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영실은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동래현의 관아에서 일하던 노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난 그는 태종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 기술자로 종사하다 이후 상의원에 소속되어 뒷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과 더불어 천문기구 제작에 전념, 노비출신에서 종 3품에 이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종 대왕 시절의 장영실 입니다. 노비 출신인 장영실은 자격루를 개발한 공로로 장영실은 종 3품인 대호군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오릅니다. 개천에서 용난 격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개천에서 용난다는 최고의 예는 물시계와 자격루 등을 만들었던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을 들 수 있습니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즉 노비였습니다. 장영실의 부친은 원나라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합니다. 노비에서 많은 신하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상의원 별좌를 거쳐 정4품 호군의 관직까지 올랐으니 예로 들만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종의 가마 안거가 부서지면서 그후로 장영실의 기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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