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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재규어247
푸른재규어24724.02.16

고구려는 당나라와 어떻게 척을지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여? 신라와 당나라가 합당하여 고구려가 무너진걸로 아는데요~ 그런데 처음에는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한걸로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척을 지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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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나라는 최대 5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고 하북의 세금을 대고구려 전선에 전용하는 등 국력의 상당수를 소모하였으며, 이에 따라 당나라는 3차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입은 내상을 굉장히 오랜 기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당나라가 등장했다. 고구려에서도 영류태왕이 즉위했다. 두 나라는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를 교환하는 등 한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평화는 매우 불안정했다.


    당나라 건국자 고조(李淵)는 624년에는 “명분과 실체는 일치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다. 당나라 스스로가 존대하다면 고구려에게 신하를 강요할 필요가 있느냐”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중화중심의 일원적 세계관을 고구려에게 강요할 생각을 버리고, 평화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구, 온언박 등 당나라 신하들은 당나라가 태양이며, 이민족의 나라는 뭇별이라는 화이론의 세계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당고조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였다.


    당나라 지배층들은 당나라 중심의 일원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단지 당장 돌궐과의 충돌, 내부 반란세력의 제거 등의 문제로 국력이 예전 수나라만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고구려와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국력이 강해진다면, 양국 사이의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


    626년 당나라에서 ‘현무문의 변란’이 일어났다. 당고조의 차남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해 스스로 2대 태종이 되는 궁중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권력을 잡은 과정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 등에서 수양제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당태종은 신하들을 포용하는 능력만큼은 수양제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큰 행운도 따랐다. 한때 당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동돌궐이 630년 당나라와 설연타의 협공으로 인해 멸망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외 팽창에 자신감을 갖게 된 당태종은 631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장손사라는 자는 고구려에서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 버리는 도발을 저질렀다. 강성해진 당나라가 언젠가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646년까지 16년간 요동 지역에 천리에 걸쳐 성을 쌓으면서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이, 당나라는 638년 토번, 서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639년에는 고창국을 멸망시키는 등 나날이 강성해져 갔다. 그러자 640년 고구려 영류태왕은 태자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며, 평화를 위한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641년 사신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 내부 정세를 염탐하는 등, 침략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당나라 내부사정이 아직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 공격을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642년 고구려에서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던 영류태왕을 몰아내고 연개소문이 보장태왕을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때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도움을 요청해왔다. 당나라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신라는 당나라의 속방이니,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당나라의 노림수였다. 고구려의 대응 태도를 보고,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고구려는 당에게 굴복하는 결과가 된다.


    신라는 약소국이었기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할 경우 유연하게 머리를 숙이며 기존의 강대국을 견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인 고구려는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을 경우 힘을 겨루어야지 먼저 굴복할 경우 고구려를 따르는 여러 세력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강대국의 지위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도발에 적극 대응하여, 당나라 사신 장엄을 굴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당나라 사신 이의침은 고구려 태왕이 부르자 엎드려 기어가서 절하고 엎드렸다.


    당나라에 소극적인 정책을 펼친 영류태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당태종은 명분을 만들어 고구려를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643년 당시 그는 황제로서의 권위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후계자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아들을 태자로 삼지 못하고, 장손무기 등 신하들이 추천한 이치를 황태자로 삼아야만 했다. 그래서 신하들 앞에서 자살 소동까지 벌여야 했었다. 따라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태종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44년 2월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