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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해사이에 방황하는 토끼
달과 해사이에 방황하는 토끼23.12.21

신라 적석목곽분은 한창 유행후 더이상 만들어 지지 않았나요?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인 적석목곽분은 왜 더 이상 만들어 지지 않았나요? 무덤 풍속이 계속 유지 되지 안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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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돌무지봉토분에 대해서는 구조상의 계통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먼저, 전통적인 움무덤과 덧널무덤이 압록강유역에서 성행했다가, 다음으로 서울 석촌동·대구 구암동을 거쳐 경주지역으로 들어온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변모하였고, 여기에 다시 한강유역에서 조영되던 원형봉토분이 남하함으로써 돌무지 위에 봉토를 입히게 되어 지금과 같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이 경주지역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미추왕릉(283년)을 처음으로 ‘대릉(大陵)’이라 부르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김씨왕들에 의한 경주평야에서의 특별히 큰 고총 축조가 적어도 3세기 말에는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돌무지봉토분은 이상과 같은 복잡하고도 특이한 구조 때문에 도굴이 용이하지 않아 다른 종류의 고분들에 비해 껴묻거리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금관총을 비롯해 경주분지 내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돌무지봉토분에서 순금제 금관이나 각종 귀금속 장신구 등 풍부한 양의 껴묻거리가 출토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구조 때문이다.

    종래의 학자들은 돌무지봉토분이 덧널·돌무지·봉토·둘레돌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조적 특징을 들어 흔히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묘제 연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덧널이 경주 황오동고분군 중에는 없는 것이 많은 점을 감안한다면, 돌무지봉토분이라는 명칭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초부터 6세기 전반대까지 경주시내 평지에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4세기대 이전의 무덤이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무덤의 구조 자체만 보면 알타이지방의 파지리크에서 발굴된 돌무지덧널무덤과 유사하여 신라의 지배집단은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주민이라고 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었다. 근래에는 울산과 포항 등 경주 주변지역에서 5세기대 이전에 속하는 덧널무덤들이 많이 조사되면서 이들을 검토해 2세기 중·후엽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덧널무덤이 연속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의 형태가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나왔다. 즉, 초기형 덧널무덤이 3세기 후반에 으뜸·딸린덧널식으로 발전하고 3세기 말경부터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공간을 돌로 채우다 덧널 위로도 돌을 쌓게 되면서 돌무지 봉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3세기 말경에 나타난 최초의 원시적인 봉분과 둘레돌이 발전하여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완성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이 되었다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돌무지덧널무덤의 기원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이 무덤 양식이 신라 중고기 대표적인 묘제로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시기에 유행하였으며 그 거대한 규모와 풍부한 껴묻거리 등은 이 묘제의 독특한 특성으로서 지목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유행일 뿐이라 유지가 안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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