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코다가마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항로를 개척했으며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인도항로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흔히 대항해시대라고 하면 15 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의 배들이 세계 곳곳의 바다를 누비며 대륙 간 항로를 개척하고, 새롭게 만난 세계에 대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탐험과 무역을 시작하던 시기를 말한다고 합니다. 지리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탐험은 언제나 있었지만,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만큼 활발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대항해시대의 문을 가장 먼저 연 것은 대서양에 접해있던 나라 포르투갈이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은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아시아와의 육로 무역이 어렵게 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바다로 나아가 인도와 중국에 닿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열망을 실현해 준 사람이 바로 바스코 다가마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ㆍ인도 항로의 발견자. 시네슈에서 출생.
카스틸랴의 전쟁에 종군, 명선원(名船員)으로서 명성을 얻고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및 앙리케의 유지(遺志)를 이어 항로 발견을 기도했다. 1497년 7월 8일 4척으로 된 탐험대의 지휘관으로 리스본을 출발, 남 아프라카의 센트 헬레나 만에 기항한 후, 11월 22일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아프리카 동안(東岸)의 말린디에 도착했다. 다시 대양을 횡단하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1499년 9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귀항했다.
콜카타에 파견된 카브랄의 군대가 토민(土民)의 반란으로 살륙된 때문에 다시 인도에 항해(1502), 도중에서 소팔라ㆍ모잠비크ㆍ말라바르의 연안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콜카타에 이른 후, 성(城)을 소각했다. 뒤에 코친(Cochin)에 항해하여 유리한 교역(交易)을 했다. 1503년 인도로부터 16척의 배에 화물을 만재하고 귀국, 이후 포르투갈ㆍ인도 간에 순조로운 상업 교통이 지속되었다. 한때 은퇴했으나 마누엘 1세의 고문이 되고(1505까지), 1519년 비디게이라의 백작위를 받았다. 1524년 인도에 반란이 일어나자 세 번이나 도항(渡航), 반란을 진압하고,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코친에서 객사했다.
그의 최초의 항해에 대하여는 카몽이시의 《우스 루지아다스(1572)》에 수록되어 있고 그의 발견이 유럽에 준 영향은 당초에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보다도 컸다고 평가됐다.
출처 : 인명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도로 가는 항로의 개척자로 1497년 마누엘 왕의 명을 받고 리스본을 출항하여 그해 11월 희망봉에 도달 후 인도양을 횡단해 1498년 5월 이도의 캘리컷에 도달했습니다.
현지에서 캘리컷 지배자의 적대적인 태도와 인도양 무역의 독점권 탈취를 두려워한 이슬람 상인의 박해를 받았으나 다음해 탈출하여 리스본에 귀항했으며 이로써 인도로 가는 직접 항로가 열렸는데 이는 동서 교통 역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며 가마는 그뒤 인도의 총독이 되었으며 현지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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