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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12.10

독립운동 중에 국채보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서

대구에 구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다녀 왔는데요,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하더라구요~!!

일제강점기 때 실시한 국채보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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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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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가 궁금하군요.

    제일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은 경상도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키 위한 특별회를 연 뒤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제의하였다. 월초순 김광제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서울에서 취지문을 맨 처음 보도한 것은 2월 16일자의 제국신문이었다. 대동광문회는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 · 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의연금을 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자 윤웅렬, 이상재, 유길준, 양기탁 등 조정의 관료들도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고, 윤웅렬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제2대 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국채보상기성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언론기관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참여하였고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면서까지 국채를 갚으려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고 전해집니다. 그 밖에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민원식 등도 1907년 5월 이전에 5전, 5월 24일에는 200냥의 기탁금을 기부해왔습니다. 또한 대구를 비롯하여 한성부, 진주, 평양 등지에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는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유례없는 경제적 운동이었으나, 상위계층과 부자들의 참여가 부족하였다는 한계점이 있었고, 일본제국이 일진회를 조종하고 그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한 결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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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했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합니다.

    이로 1905년 6월 구채상환 및 세계보충비로 도쿄에서 200만원의 공채를 모집하지 않을수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원이 됩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 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고 이런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면서 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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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탑압하며

    양기탁 등을 구속하는 등하여 위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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