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4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원형봉토분이 들어오면서 분구와 그 주위의 묘계에 잔디를 심은 것은 지금 평양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다.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은 조경적 미화도 겸하는 것이지만, 원래는 무덤을 유실이나 붕괴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가 앞섰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 나타나는 묘수 · 호석 · 잔디 등의 보호 대비는 백제와 신라에서도 나타난다.
서울 석촌동의 백제 고분인 제3호 · 4호분은 정방형 기단식적석총인데 그 아랫단에 자연석의 호석들이 서 있다. 이 묘계에도 본래는 송림으로 외곽을 조성하였던 곳이다.
백제는 5세기 후반에 석실봉토분으로 변하면서 분구에 잔디가 심어지기 시작하였고 공주의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부여 능산리 고분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신라의 왕릉들이 당시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던 신림(神林) 가에 많은 것은 묘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릉(五陵)이 천경림(天鏡林) 가에 있고, 선덕여왕릉과 신문왕릉이 신유림(神遊林) 가에, 내물왕릉과 미추왕릉이 계림(鷄林) 가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김유신조(金庾信條)에 김유신의 부인인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상곡(靑淵上谷)에 장사지냈는데, 봄이 되면 집안의 사녀(士女)들이 모여 잔치를 할 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가 골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으니, 능묘 주위의 송림과 조경적 환경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지금도 경주의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에는 고운 잔디와 울창한 송림이 잘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