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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움집은 어느 정도의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구석기 시대의 움집을 보면 지푸라기와 진흙같은 것으로 지어진것 같은데.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을만큼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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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2500년전의 움집을 만들어서 내구성을 실험해보았다고 합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기 위해 2천5백년 전으로 시계를 돌립니다.
    당시 도구와 방식 그대로 움집 재현 실험에 들어간 겁니다.
    먼저 돌도끼를 챙겨 산에 올라 기둥과 서까래용 목재를 구합니다.
    머리에 홈을 파고 자루를 덧댄 돌도끼로 수십 번을 내려치니 나무가 쓰러집니다.
    한 무리는 예리한 돌낫으로 지붕에 얹을 억새를 베어냅니다. 자재 확보가 끝나자 터파기가 시작됩니다.

    어린이들이 참여해 돌괭이와 돌호미, 사슴뿔로 깊이 70센티미터의 집터를 완성합니다.
    "더 파라면 더 팔게! 50센티미터. <집 안 무너지게 이렇게 해줘야지.>"
    3개월이 지나 비로소 시작된 본격적인 집짓기.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립니다.
    칡넝쿨로 뼈대를 단단히 고정한 뒤 억새와 볏짚을 얹자 2천 5백년 전 움집이 완성됩니다.

    [조가영/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학예연구사]
    "실제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을지 보다 생동감 있게 복원을 하기 위해서…"
    겉모습은 엉성해 보여도 강한 비바람도 거뜬히 버텨냈습니다.
    "호우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비가 많이 왔던 날이 있었는데 그날에도 내부에는 침수피해라든지 물이 들이치는 상황이 전혀 없었고…"
    청동기 시대 움집은 1년간 존치해 내부 온·습도 변화와 내구성을 실험합니다.
    국내 최초의 재현 실험이 청동기시대 주거문화와 생활상 연구에 이바지할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사냥감을 찾아서 이동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이나 움집의 전 단계인 막집에 살았습니다


    움집은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 나타났습니다. 비바람을 막아낼정도로 내구성이 좋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움막·움막집이라고도 하며, 고고학에서는 수혈주거(豎穴住居)라 한다. 벽체라는 개념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려는 요구를 만족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땅을 파서 자연적인 토벽을 만들어 지붕만 덮는 움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집은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인 삼국시대까지 보편적인 살림집으로 이용되었다고 추측된다.


    3×6m 정도의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땅을 추운 지방에서는 1m 정도, 따뜻한 지방에서는 50㎝ 내외의 깊이로 파낸 뒤 바닥을 평평히 고른다. 그 후 파낸 땅바닥의 길이 방향 중심선에 3m 간격으로 두 개의 기둥을 땅에 박아 고정시킨다.

    Y자형 기둥머리 사이에 도리를 걸쳐 끈으로 고정시키는데, 이러한 방식의 기둥을 외다리형 기둥이라 하고, 도리와 기둥의 결구방식은 가랑이맞춤이라 한다. 서까래로 쓰일 약간 굵은 나뭇가지의 한쪽 끝은 파낸 땅 바깥 주위에 비스듬히 구멍을 파고 묻어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 끝은 도리에 비스듬히 걸쳐 고정시킨다.


    기둥 높이의 4분의 3 정도 되는 위치에 ‘지르메’라는 짤막한 도리를 묶어 짧은 모서리 부분의 서까래를 고정시키면 우진각 형태의 지붕틀이 만들어진다.


    서까래 위에 가는 막대기들을 발같이 엮어 그 틈새마다 풀이나 짚단을 아래쪽부터 끼워올라가면서 지붕을 잇고 용마루에 해당하는 부분을 거적 따위로 씌워 빗물이 지붕을 타고 흐르도록 한다.


    짧은 모서리의 한쪽에 입구를 내고 출입을 위하여 움집 내부에 계단을 만들거나 입구 바깥쪽 땅을 비스듬히 파내어 경사로를 만들면 움집이 완성된다. 필요에 따라서 길이방향으로 기둥 한 두 개를 더 세워 기다랗게 확장해나갈 수 있으며 이 때는 입구를 양쪽에 내어 출입에 편리하도록 한다.


    바닥 면적은 20∼30㎡, 평균 5, 6명의 식구가 사용하였다. 이동 생활이 요구되는 수렵·채집 경제 시대의 움집은 원형 평면이 일반적이었고, 정착생활 단계인 원시농경시대에는 방형(方形) 평면이 일반적이었다. 두 평면 사이에 과도기적 형태로 사각형의 모퉁이를 둥글게 한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평면도 존재하였다.

    이렇게 정착된 직사각형 평면은 이후 민가에 있어서 원형적인 평면 형태가 된다. 내부 공간은 점차 기능에 의하여 분화되어 출입구 가까이는 농기구를 둔 남자들의 공간이 되고, 가장 깊숙한 곳은 토기 등을 둔 저장공간인 동시에 여자들의 공간이 되며, 중간은 작업공간이 된다.


    이러한 원초적인 기능분화는 후대 민가의 공간 기능의 원형이 된다. 남자들의 공간은 사랑방·사랑채로, 여자들의 공간은 안방·안채로, 작업공간은 부엌과 행랑으로 각각 발전하게 된다.


    움집을 만들어 비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난방은 화로인 노(爐)에 의존해야 하였으므로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편은 철기시대에 이르러 온돌이 발명됨으로써 해소된다.


    철기시대의 움집에 사용된 초기의 온돌은 한줄로 고래를 만들어 바닥의 일부만을 난방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깡[炕]’과 유사하지만 점차 바닥 전부에 구들을 놓아 우리 나라의 보편적인 난방 방식인 온돌이 완성된다.


    이와 같이 움집은 구조·방법·평면의 형태, 공간의 분화, 설비의 면에서 모든 살림집의 원형이 된다. 움집은 내부의 가장자리가 낮아서 활동이 불편하고 창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채광과 환기가 극도로 불리하다. 따라서, 벽체가 땅위로 올라온 이후에는 주거용으로 움집을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임시가설용 주거나 깍정이·넝마주이와 같은 하층민의 주거로 이용된 예만 발견할 수 있다. 영동지방에서는 김치를 얼지 않게 저장하기 위한 ‘김치깍’이나 소여물을 저장하는 ‘깍지우리’ 등에 움집을 이용한다. 다른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저장용 건물로 움집을 이용하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구석기 시대의 움집은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지어졌지만,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을만큼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움집은 일반적으로 지푸라기와 진흙을 섞어 만든 판자로 지어졌습니다. 이 판자는 흙벽에 붙여서 단단하게 만들었고, 지붕은 나무 기둥을 세워서 판자로 덮었습니다. 또한, 움집 주변에는 울타리를 쳐서 동물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비바람과 추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움집은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불이 나더라도 쉽게 타지 않아 안전했습니다.

    물론, 구석기 시대의 움집은 현대의 집과 비교하면 내구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 수준과 자원 제약을 감안하면, 움집은 충분히 안전한 주거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움집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 비바람과 추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 불이 나더라도 쉽게 타지 않아 안전했습니다.

    •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움집을 통해 안전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