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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3

공민왕과 기황후는 정확히 어떤 관계였나요?

공민왕은 교과서에서 대단히 개혁적인 부분에 집중한 군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모 드라마에서 기황후를 원나라에서도 고려를 생각해준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그리더라구요. 물론 드라마라서 각색된 부분이 있겠지만 공민왕과 기황후가 서로 대립했던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이 둘은 왜 대립을 하였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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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개의 답변이 있어요!
  • 노란굴뚝새46
    노란굴뚝새4623.08.14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황후는 원나라 혜종 우카가투 칸 토곤테무르의 3번째 황후로 혜종의 제2계후이자 3번째 정실부인입니다.기씨의 고려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기설렁거 올제이 후투그라는 몽골식 이름만 전해집니다. 기황후가 득세하자 고려가 받은 악영향은 매우 심각했는데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자 고려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기황후는 자신의 친정인 행주기씨 가문의 잇속을 챙기려고 고려에 많은 간섭을 행사했으며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도 갖은 패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31대 공민왕 왕전은 1356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부원배 기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조리 숙청하고 맙니다. 이에 기황후는 격노하여 1363년 덕흥군 옹혜를 고려의 국왕 조카 기삼보노를 고려의 왕세자로 삼고자 원나라 군대 10,000명을 보내 고려를 침공했으나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였습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들을 유력자에게 선물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기황후는 사후에 고려에 묻힐 것을 원했으나 공민왕은 자신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옹립하려던 기황후를 순수히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추정합니다. 기황후가 고려에 묻혔다는 기록이 어디에도없기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