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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10.26

조선의 숙종때 환국정치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

조선이란 나라는 왕정국가로

왕의 힘이 강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숙종의 재위기간에만 3번의 환국이 있었을 만큼

신하들의 힘이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숙종은 어떤 이유로

왕의 권위를 잃고 관료들이 사회를 시끄럽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요?

숙종때만 환국이 3번 있을만큼

왕권이 약해진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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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대까지 서인과 남인은 붕당 정치의 틀 속에서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면서도 공존했습니다. 그런데 숙종 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숙종은 1680년(숙종 6) 남인의 역모 사건 등을 계기로 남인을 처벌하고 서인으로 급격히 정권을 교체시켰습니다.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합니다. 9년 뒤인 1689년(숙종 15)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을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하여 원자(元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694년(숙종 20)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시켰습니다. 이를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합니다.

    이렇듯 붕당의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붕당 정치의 자기 조정 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때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에 따라 급격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상대 당의 과도한 희생이라는 부작용 속에 이루어진 환국은 붕당 간의 견제와 공존이 가능했던 붕당 정치와 국왕 주도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 정치 사이에 등장한 과도기적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음... 환국은 신권의 강화를 보여주기 보다는 국왕권의 강화에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오히려 붕당정치기 상호 균형인 상태에서 국왕이 개입하기 더 어려웠죠.


    숙종 시기 있었던 3차례의 환국을 보면 결국엔 숙종 자신과 매우 밀접합니다. 서인이 쫓겨난 기사환국은 숙종의 후사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고, 갑술환국은 남인의 전횡을 보다못한 숙종이 내린 처분입니다.


    이렇듯 붕당 간의 극한 대립인 환국에 국왕이 직접 개입하였고, 국왕은 사안에 따라 특정 붕당의 손을 들어주어 정국을 뜻대로 좌우하였습니다. 즉, 붕당의 운명은 결국 국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갈린 겁니다.


    이후에도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 개입하여 노론의 손을 들어주는 등, 사실상 환국은 국왕의 역할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정통성과 권력 강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