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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는 16세기 초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역할이 강화되었습니다. 비변사는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리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인사 관리, 재정 등 국가 정책 전반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최고 기구가 되었습니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전후 복구 사업과 후금(청)의 침략,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변사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 결과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변사 체제는 주요 관리들이 비변사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각종 정책을 결정하면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았으나 국정 주도권을 장악한 붕당의 주장이 주로 관철되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세도정치 시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면서 비변사는 점차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고종 초 비변사가 축소,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부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