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백두산 정계비 해석 논쟁과 간도 협약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청나라와 조선의 해석이 달랐다고 하네요. 간도는 우리땅이었으면 지금보다 영토가 더 컸을테고요. 어떤 이유로 간도를 상실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조약. 19세기부터 간도 지역에 조선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여 청과 조선 사이에 영토 분쟁이 발생하였다. 1712년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 의하면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동쪽으로 토문강, 서쪽으로 압록강이다. 토문강을 조선은 중국 송화강으로, 청나라는 두만강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송화강과 두만강 사이의 영토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지역을 간도라고 한다. 1909년 일본과 청은 간도 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의 영토로 하였고, 일본은 만주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였다. 간도 협약에 조선이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간도협약은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이다. 청나라는 간도 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이주를 엄금했다. 이후 간도 지역은 불모지로 변했고 국경상의 경계도 모호해지면서 많은 외교적 문제를 낳았다. 이에 조선과 청은 1712년 국경문제를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으나 ‘동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것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 분쟁의 여지를 남겼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정하던 일본은 남만주 철도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국에 넘기는 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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