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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푸른점
창백한 푸른점23.08.22

철기문화가 최초발달한 히타이트는 왜 세계를 제패하지 못했나요?

역사를 배우다보면 과거 청동시대에서 철기문화로 넘어갈때 최초의 철을 사용했던 히타이트족에 대해 배웠는데요

청동기무기보다 강력한 철기무기가 발달한 히타이트족은 왜 세계를 제패하지 못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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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렇다면 히타이트는 대체 왜 이렇게 급속도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많이 알려진 바로는 “해양 민족들(Sea Peoples)”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단시간에 약탈당하고 불타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간편하면서도 드라마틱한 가설은 학자들의 꾸준한 발견과 연구로 인해 학계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해양 민족들”이라는 용어는 람세스 3세 시기 작성된 보고서에 기초한 것으로, 학자들은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해안 도시들을 괴롭혔던 불청객들을 지칭할 명칭을 딱히 통일하지 못해 이집트 문헌에 기록된 대로 편의상 “해양 민족”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그러나 이 용어로 당시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 동지중해 연안을 휩쓴 약탈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히타이트 멸망 원인으로 지목된 위의 가설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집트 측이 말하는 “해양 민족들”의 습격이 비단 이 시기의 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람세스 2세 시기부터 해적들의 습격이 빈번했으며, 하투실리 3세 또한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해 수필루리우마 2세 때는 그러한 해적들과 싸워 이기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이 해적들은 “해양 민족들”이라고 단일하게 부를 수 없는 여러 지역 출신의 각기 다른 무리들이었고, ‘해양’이란 말이 암시하듯 섬이나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출신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킬라인들이 동부 지중해 지역을 약탈해 히타이트의 식량 보급로를 위협했고, 아나톨리아 남서쪽 지역의 루카와 바다 건너 아히야와 사람들(미케네 멸망으로 떠나온 사람들이라 추측됨)도 해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루카의 해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도피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들의 약탈 행위는 당시 전(全) 오리엔트적 현상이었고, 꼭 해안가에만 한정된 현상도 아니었다. 트레버 브라이스(Trevor Bryce)는 “해양 민족들”에 의한 히타이트의 멸망설에 반대하면서, 당시의 약탈 행위는 크고 작은 집단들 사이에서 나타난 일종의 ‘민족이동’이라는 큰 틀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들의 이동과 약탈 자체가 당시 후기 청동기 세계의 재앙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무너져가는 후기 청동기 시대 고향에서 쫓겨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으려는 결과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소위 이 “해양 민족들”들이 청동기 시대를 마감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이미 저물어가던 시대의 영향을 받아 ‘민족대이동’을 하게 된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나온 집단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팔레스타인 등 각기 다른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50년, 길어야 70년 안에 에게해와 아나톨리아, 지중해 동부 해안의 청동기 왕국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이름 없는 소국으로 전락했다. 히타이트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히타이트는 왜 이런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으며 결국 멸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유력한 이론들을 살펴보자.


    1. 기원전 1200년경 동지중해 세계는 장기간 지속된 심한 가뭄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식량 부족에 따른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실제로 수필루리우마 2세는 이집트로부터 “나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대량의 식량을 지원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2. 이보다 더 광범위한 이론은 무역·상업을 비롯한 체제 전체의 붕괴에 따른 멸망설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던 레반트와 에게해 지역의 경제권이 미케네 왕국의 멸망으로 그 기능을 상실한다. 그러자 동지중해를 둘러싼 국제무역이 위기에 빠지고,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치 동맹까지 존재의 이유를 잃으면서 국가간 갈등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무역망을 통해 공급되던 식량, 금속, 사치품의 재분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특히 하투샤와 같이 자급자족 능력이 부족한 대도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3. 후기 청동기 시대에 전쟁을 위한 무기나 기술의 급격한 혁신이 일어나면서, 뒤쳐졌던 지역들이 앞선 기술을 받아들여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창으로 무장한 밀집 보병대, 긴 검과 방어용 갑주 등을 이용한 새로운 전쟁 방식이 전차 부대를 주력으로 오랜 번영을 누린 고대 오리엔트 왕국들을 무력으로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4.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왕가 내부의 정치적 분열이 히타이트 위기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다.


    5. 이 시기 대규모 민족이동에 의해 소아시아와 지중해 전체의 세력권 재편 현상이 나타났다. 히타이트의 멸망은 이 전체적 현상의 하나로, 기원전 13세기를 지배했던 대왕국들 중 청동기 시대 종말기를 무사히 지나간 곳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거의 2000년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해양 민족설”과 같은 단발의 강력한 파괴와 약탈, 화재에 의한 하투샤의 멸망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과 그에 따른 연구를 통해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까지 보가즈쾨이의 발굴 작업을 주도했던 위르겐 제어(J. Seeher)는 화재가 일어난 건 분명하지만 갑자기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상부도시의 신전이 불탄 흔적은 절반도 안 되며, 불에 타버린 큰 신전 바로 옆의 건물들에서는 화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제어는 불에 탄 건물들이 텅텅 비어 있었고, 약탈 흔적이 없으며, 죽은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신전과 궁전의 인구가 화재에 앞서 먼저 빠져나가고 한참 후에 화재가 일어났을 거라고 결론 내린다. “하투샤는 번성하는 수도로 적과 싸우다 점령당한 것이 아닙니다. 도시는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버려졌습니다. 파괴당한 것이 아니라 몰락했던 거지요.”


    제어는 이 몰락의 원인을 왕위를 둘러싼 내분과 갈등, 무역망의 상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부족, 여기에 적의 침략까지를 들고 있다. 사실상 위에 언급된 5가지 멸망 이론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수필루리우마 2세 때 이미 수도로서 기능을 상실한 하투샤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먼저 도시를 빠져 나가고 이후 점차 남은 사람들의 이탈과 방화로 도시가 몰락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역사상 멸망한 나라들을 보면 그 이유에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왕권 약화, 경제 불황, 내란, 외세의 침략. 사실 이것으로 거의 모든 멸망이 설명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막상 히타이트의 멸망 원인이 밝혀지면 그 내용 또한 이와 비슷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히타이트학의 극히 일부다. 로마사(史)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연구하는 것보다 어떻게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히타이트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제국이나 멸망한다. 중요한 것은 거기까지의 내용이다. 그 속의 삶과 문화, 정치와 전쟁, 신화와 종교에서 우리는 웃고 울고 배워왔다.


    히타이트학은 아직 젊다. 문자가 해독된 지 100년도 되지 않았으며, 상형문자 해독의 역사는 그보다 더 짧다. 학자들은 언젠가 (제어의 이론이 맞다면) 도망친 수필루리우마가 정착한 도시를 찾아내어 중요한 문서들을 통해 제국의 마지막을 정확히 밝힐지도 모른다.


    혹은 히타이트 왕가의 후손을 자처하는 지배자들의 무덤이나 도시를 발굴하여 히타이트의 역사가 늘어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역사의 물음표는 사실만큼이나 역사적 상상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누군가 빙클러나 흐로즈니처럼 엄청난 발견을 할지도 모르겠다.

    출처 : 뜻밖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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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타이트족은 고대 아나톨리아(지금의 튀르키예)에 기원전 1600년-기원전 1178년 동안 존재했던철기를 사용한 민족으로 이집트나 바빌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제국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1907년 아나톨리아의 보아즈칼레에서 수토 하투하가 발굴되어 히타이트 유물을 통해 존재를 알 수 있었습니다. 히타이트족은 인도유럽어 중 하나인 아나톨리아어파에 속하는 히타이트어를 사용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으로 쐐기문자를 사용했습니다. 히타이트족은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민족으로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려면 풀무질을 해야하는데 당시 히타이트에는 풀무가 없어서 자연바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때문에 수도인 하투샤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풍으로 철을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이집트나 바빌론보다 우수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청동기문화의 끝을 알리는 바다민족의 이동이 유럽대륙에서 시작되면서 미케네와 트로이 등과 함께 멸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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