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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가지나무
구르미가지나무23.08.14

중세 유럽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중세유럽에서 왕의 힘이 굉장히 강력한 나라들이 많았다고 알고있는데요. 그에 못지않게 교황들의 권력도 막강했다고 들었습니다. 힘이 어느정도였길래 왕들이 함부로 하지못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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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죠.

    1077년에 일어난 사건인데요.

    독일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4세가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빌었던 사건입니다.

    사건의 원인은 주교임명권이었는데요.

    황제는 영주의 권력을 가진 주교들을 임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교황은 주교임면권이 교황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

    1073년 그레고리오7세는 교황이 되면서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과 교황청에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시기에 작센에서 반란을 진압하던 하인리히4세는 1075년 반란을 진압하고, 밀라노의 주교 선출 권리를 행사했고,

    원칙주의로 개혁을 주장하던 그레고리오7세는 하인리히4세를 기독교에서 파문시켜버립니다.

    황제가 통지권력을 강화하려면 영주들의 충성을 받아내야했기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주교들을 서임권을 행사했죠.

    그러나 교황은 종교적인 추종세력이 많았기때문에,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에서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이끌어냅니다.

    이 배경은 하인리히4세의 강력한 황권에 부담을 느낀 제후들이 있었고,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돌아서버린 것이죠.

    하인리히4세는 사신을 보내었으나 교황은 두려워 피해버립니다.

    1077년 1월 말 하인리히4세는 카노사로 피해 버린 교황에게 직접 추운 날씨에 맨발과 누추한 옷을 입고 성문 앞에 무릎을 꿇죠.

    교황은 주저하다가 3일이 지나 파문을 취소해 줍니다.

    하인리히4세의 파문이 취소되었으나, 신성로마제국에는 새로운 루돌프를 황제로 등극시키려고 반란이 일어납니다.

    교황은 루돌프를 지지하며, 하인리히4세를 다시 파면해 버렸으나,

    교황의 변심때문에 제후들이 하인리히4세를 도와, 1081년 바이스 엘스터 강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황제로 추대된 루돌프가 전사하고 반란세력은 흐지부지되어 버리죠.

    하인리히4세는 내란을 진압하고 황권을 강화하며 그레고리오 7세와 손 잡았던 제후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그 해에, 동로마제국황제였던 알렉시우스1세가 이탈리아 노르만족의 침입하자, 하인리히4세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하인리히4세는 동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후에, 그레고리오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3세를 교황으로 선포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합니다.

    복수를 한 셈이죠.

    교황이 제후들과 제국의 틈에서 줄타기를 잘 하면 황제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던 시기도 있었고,

    오히려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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