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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도 동백림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1967년 박정희 정부 시기에 동백림이라는 사건이 발발 하였는데요 한두 번 들어 보았으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동백림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경과 / 결과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9년 3월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복이 두려워서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 정규명·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의의와 평가

      동백림사건은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기획·조작된 사건은 아니지만 실제 수사결과와 발표에 의해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냉각되었다. 또한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대남공작 실상을 국제적으로 폭로함으로써 유럽지역에서 북한의 대남공작을 견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프랑스 등으로부터 주권침해 공세에 시달리면서 국제사회에서 국가 신인도가 추락되고 윤이상·이응로 등을 위한 국제사회의 탄원운동 등으로 인권후진국으로 낙인찍혔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백림사건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백림은 한자어 발음으로 부른 것이고 사실은 동베르린 사건 입니다. 1967년 7월 8일 중앙 정보부 김형욱 부장 시절의 공안 사건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가운데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노, 시인 천상병 등도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1967년 12월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가운데 34명이 유죄판결 받았지만,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 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과 독일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 이응로, 학계의 황성모, 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한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합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로 심리하기로 결정, 1969년 3월 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해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합니다.

      중앙정보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보복이 두려워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했고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재판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켜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해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 정규명, 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백림 사건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