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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양241
빼어난양24124.01.20

조선에서 화교가 크게 급증한 시기는 언제인지 알고 싶습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화교인들이 있다고 들엇는데요.

그런데 크게 급증한 시기는 따로 있다고 들엇는데 조선에서 화교가 크게 급증한 시기는 언제이며 왜 크게 급증하게 된것인지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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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4.01.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한 화교가 한국전쟁으로 남한으로 넘어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중국 국적의 북한 화교가 중국으로 가서 살다가 6개월 이내 북한으로 들어오면 다시 북한에 거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양에도 화교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북한 화교들이 남한으로 와서 거주 의사를 밝힐 경우에는 국정원 심사를 통과하면 한국 국적을 받고 한국에 거주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 국적이기 때문에 탈북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무국적자 대우를 받았으나 이후 인도적 차원에서 탈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일반 탈북민과 같은 탈북행 루트를 거친 경우에 한하여 받아주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만갑과 배나TV에 출연한 북한 화교 3세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 와서 국정원을 나온 후에 신분증(한국 국적)은 받았지만 다른 탈북민처럼 임대아파트 우선권, 정착금 같은 지원은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 집권 당시 갑산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을 제거하였으며, 그 와중에 화교를 도울 수 있는 중국계 세력인 연안파도 쓸려나갔다. 대장정 참가자이며 중공군 장성 출신이던 무정마저 6.25 전쟁의 책임을 구실 삼아 실각하였습니다. 대장정 생존자들은 중국에서도 영웅 대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김일성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에 대해 알 수 있다. 게다가 후에는 주체사상의 확립 등으로 인하여 실제 중국인이나 중국 세력이 힘을 뻗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북한 화교는 한국보다 많은 5만명 수준이었으나 전쟁통에 자본주의자들은 월남하고 일부는 중국이나 대만으로 갔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엔 1만까지 줄었으나 중국에서 대약진 운동실패와 문화대혁명등 사고가 터지자 중국에 있던 화교의 친족 등이 입국하면서 2만 5천명까지 늘었습니다. 90년대 초반 동유럽과 소련이 차례로 붕괴 되면서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거지가 된 북한이지만 당시엔 소련의 지원 등으로 생활 수준이 중국보다 괜찮았습니다. 79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및 화교에 대한 귀국지원정책과 더블어 90년대 중반 북한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역전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중국으로 되돌아가서 현재는 약 5000명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2009년 기준이라 더 줄었는지 아니면 보따리 장수 등으로 더 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 비해 너무 낙후한 북한의 경제사정과 화교를 돈주머니 쯤으로 여기는 북한 현지 관료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화교들은 아버지 세대와 달리 중국에서 거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요식업에 종사한 한국 화교와 달리 북한 화교들은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 이는 주로 이 화교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에 농토를 받은 탓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7년~1928년 사이에 중국의 은값은 폭락하며 떨어지고 중국 내에서 동란이 일어나니 중국인 도래가 크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1927년 2월 25일에는 중국인 800명이 들어오더니 그뒤 더욱 증가했고 3월까지 들어온 수는 14,000여명에 이렀고 4월 한 달 동안에는 5,000명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7월중 신의주를 거쳐 들어온 화교의 수는 2,605명에 이뤘고 해가 바뀐 1928년 3월 그믐까지 700명이 들어와 평양부근 노동계를 위협할 정도 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화교 사회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며 임오군란으로 군인들이 인천에 있을 때 그들의 식사와 허드랫일들을 도우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소작농과 노비 등 하층민 중국인 남성 여성들이 인천에 건너왔고 이들은 생업을 위해 상업활동을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몇 년 지나고 모두 돌아갔지만

    다른 이들은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에 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