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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5.24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최초의 항일 의병 운동인 을미의병은

어떤 사건, 어떤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보수적인 유생들이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의미의병이 일어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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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의병의 발생 배경으로는 일본의 왕후 민씨 시해(을미사변), 친일 내각의 단발령 시행 등이 있습니다.

    단발령이 발표되자 서울에 와 있던 김하락·구연영·조성학 등의 젊은 유생들은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포군(砲軍) 100여 명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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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습니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보수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등을 바쳐 친일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주장습니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倡義所)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 · 유성 · 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 등이 토적(討賊)의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백성의 반일 · 반정부 기운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896년 1월 중순 경기 · 충청 · 강원도 등 각 지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2월 상순에는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그리고 함경도 북부까지 확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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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유생들은 일제에 격분하여 친일 역적을 처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10월 8일,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의병들을 규합했다(10월 10일, 음력 8월 22일). 마침 고종이 각지의 유명 유림들에게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서들을 보내면서, 같은 해 10월 18일, 충청도의 의병장 문석봉이 유성 장터에서 맨 처음 유성 의병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걸고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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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미 의병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명성 왕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입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결국 안동부도 빼앗겼고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등이 의병을 일으켜 금릉 등지를 점령하고 대구에 다다랐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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