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배경과 내용이 궁금합니다.
요즘 시험준비 때문에 한국사를 다시 공부하고 있는데요.
근현대사를 공부하다보니,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이 일어난 배경과
그 내용들을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 1월10일 고부민란으로부터 비롯된 동학농민운동에서 일어납니다.
고부에서 일어만 민란은 진정되지 않고 확산되어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이 요청에 따라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여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대치하고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 동아시아 차원의 사건으로 비화됩니다.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이를 근거로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하나 일본은 거부합니다.
일본은 조선 내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이러한 변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으로 내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전까지 철수 할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고자 청국에 제의하고 일본은 청국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독단적으로 조선정부에게 내정개혁을 요구합니다
1894년 6월 남산에 있는 민영준 별장인 노인정에서 조선주재 일본공사와 조선 관리들 사이에 세 차례 회담이 열리고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이 회담에서 조문화된 내정개혁방안을 제시하지만 조선을 이를 거부합니다.
대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는데 당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외견상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조선 내의 정변에 군사력을 지원하는 것마냥 꾸미지만 실제 이사건의 주역은 일본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압박한 상태에서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하니 갑오개혁은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을 위한 명분 쌓기 용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을미개혁은 삼국 간섭 이후 일본이 약간 주춤하게 되고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합 내각이 등장하고 왕후 민씨의 세력이 친러파와 격탈하여 일본 세력 제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에 일본은 왕후 민씨를 시해하고 친일 성향이 강했던 조희연과 유길준이 참여하여 4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을미개혁을 추진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모두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한국의 혁명적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갑오개혁의 시대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김학우(金鶴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또한 을미개혁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운동을 말합니다.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강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개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성왕후의 시해에 이어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의 유림주3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 · 반개화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한 최익현(崔益鉉)의 항변은 강제적 단발에 대한 유림의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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