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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와의 무역상황은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와 무역상황은 어떠했나요?

청나라에 수출한 물품은 어떤것이 있는지

또 수입한 물건은 어떤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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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은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 조영하와 청나라의 직례총독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조선과 중국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이다. 줄여서 조선통상장정이라 한다. 서구 열강의 통상 압력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조공무역에 제한되어 있던 양국간에 새로운 통상관계가 요청되었다. 그러나 조약 서두에 종속관계를 천명하고 치외법권, 개항구 통상, 해상방위의 담당 및 연안 어업 등의 특수 권익을 청나라가 독점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약은 이후 조선이 일본 및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한 통상조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30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은 무기나 일부 물품을 제외하면 서구 열강과 그다지 교역을 할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영국은 귀족 층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발달해서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 사치 기호품에 사죽을 못썼습니다. 영국은 구입할 것이 많은 데, 중국은 무기류와 일부 공산품을 제외하면 없으니 결국 영국이 손해보는 적자 무역이 이뤄졌지요.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흑자였구요.

    청은 그다지 서구와의 무역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열의가 없었지만, 서구 열강의 줄기찬 요구로 인해 관에서 무역을 허용한 특허 상인인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무역을 관에서 파악/규제한 것입니다.

    무역이 계속되면서 적자가 누적되자, 영국은 이 자본 유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편 밀수를 계획합니다. 아편은 님도 알겠지만 '마약'. 따라서 일단 중독만 시켜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수요가 보장되고 파는 곳에서 부르는 대로 값이 책정됩니다. 당연히 공행을 통한 공식적인 아편 거래는 불가능하니 아편 무역은 청의 단속을 피해 밀수의 형태로 이루어 졌지요. 어쨌든 이를 통해 영국은 무역 적자 문제를 해소하고 오히려 막대한 흑자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편의 재배지는 (식민지) 인도입니다. 영국은 산업 혁명의 결과 공장제 기계 공업 형태를 통해 막대한 생산능력을 획득하여 뛰어난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된 면직물 제품을 당시 수공업 수준에 머물렀던 인도에 수출하였고, 그 대금을 현지에서 재배한 아편으로 받았습니다.(물론 저렴한 값으로) 그리고 자체적인 아편 소비를 엄금하고(마약이니까) 이를 전량 중국에 밀수출하였지요. 그러면서 삼각 무역의 형태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산 면직물을 중국에 직접 파는 것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이는 부유한 중국인들이 단지 값쌀 뿐 품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영국산 면직물의 구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대외 무역의 골간은 조공무역으로 조선은 명분상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를 사대하는 대가로 조공을 제공했고 일방적 공여만은 아니였으며 조공을 하면 중국에서는 그 답례로 사여했습니다. 그 사여품은 조공품보다 많은 것이 보통이라 조공은 단순한 외교관계가 아닌 중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의 일종으로 볼수있습니다.

    조선시대 공적 무역 외에 사무역은 조선 초기 상인들 사이에서 중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역관을 통한 사무역은 가능했습니다. 역관은 외국과 교섭할 때 통역을 담당하는 낮은 벼슬아치로, 사신들은 역관을 항상 대동했는데 이때 역관들은 비용을 각자 스스로 조달할수밖에 없어 개인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휴대해갔습니다. 그 자금으로 지참해 간 것은 인삼과 은이며 역관들은 조선 초 인삼을 주로 가져갔고, 후기에는 은을 가져갔습니다.

    이들은 가져간 자금으로 국내에 필요한 물품을 중국 시장에서 사가지고 돌아와 되팔아 이문을 남겼습니다.

    역관은 무역은 공적인 것은 아니되 조정에서 허가를 받은 사무역으로 역관들의 수행경비 조달을 위한 이들의 사무역은 묵인되었으나 역관들이 자금을 무한정 가져가는 것은 금하여 인삼은 80근 이내만 가져가도록 통제되었고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역관들을 통해 수입해오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중국과의 공무역의 일환으로 중강개시라는 것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도중 1593년 우리나라에 군량미가 부족하여 조선 측 필요에 따라 중강에서 조선의 은, 동, 쇠와 중국의 미곡을 교환하는 무역이 이루어졌고 중강은 압록강의 의주 맞은편 난자도인데 이곳에서 임시로 개설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이는 폐지됩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병자호란 이후 인조 24년 다시 개설, 시장은 상시적인 것이 아니어서 정부의 감시 하에 일년에 두차례 개설되었으며 시장에서 조선측에서 수출한 물품은 소, 해삼, 면포, 소금, 종이 등이었습니다. 이후 시장은 엄격한 규정을 무시하고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중강시후라는 명칭으로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가 숙종 26년 폐지됩니다. 이 후 중국의 책문에서 시장이 개설되고 두만강변의 회령과 경원에서도 국제시장이 개설되어 자유무역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