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는 말을 보았는데 네덜란드가 언제 식민지가 된 적이 있나요
서구 열강 대부분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생뚱맞게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식민지였던 적이 있었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여 도시는 광범한 자치권을 소유하며 자유의 바람이 넘쳐 있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派)의 신교도가 급증하였다. 1556년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프 2세가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임을 호언하면서 네덜란드 지방에 대한 신교파의 탄압을 강행하였으며, 도시에 대해 중세(重稅)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하며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국의 재정수입의 증대만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학정에 대항하여 북부는 물론 남부 여러 주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계급까지 참여한 항거운동이 1566년부터 전개되었다. 이때의 지도자급은 봉건적 대귀족 출신인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 등이었다.
이럴 즈음 군사적 독재권을 수임받고 정예병 1만 명을 인솔하여 1567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알바공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에 대해 잔악한 탄압을 가하였다. 이른바 '피의 평의회(評議會)'라는 심문소(審問所)를 개설하여 지도자인 에흐몬트와 호른 등을 비롯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宗敎裁判)으로 처단하였다. 또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써 상업활동이 마비되어, 매뉴팩처의 기능은 정지되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알바공의 이러한 공포정치(恐怖政治)로, 시민들은 속속 영국·독일 등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수가 10만 명을 헤아렸다.
1572년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인(人)의 저항운동은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에스파냐의 지배층으로부터 고이젠(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칼뱅파)를 중심으로 하여 처음에는 해상에서 에스파냐의 은선단(銀船團)을 습격하더니, 급기야는 오라녜공 빌렘 1세(영어명 오렌지공 윌리엄)를 지도자로 하여 다수의 귀족과 상공업자 그리고 농민들이 합세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종교적으로 대립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북 지역의 불일치(不一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여기에다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公)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1578년 남부는 에스파냐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홀란트 등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빌렘 1세를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웠다.
1584년 빌렘 1세가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된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던 중,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데다 1598년 펠리프 2세가 사망함으로써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리프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하였다.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종식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市民革命)의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출처 :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