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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5.08

고려시대 최무선의 화약 개발로 얻게 된 강점은 무엇인가요?

고려시대 청나라에 화약 제조기술을 배우러 갔으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그냥 돌아오게 된 최무선은 스스로 화약을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로 인해 고려가 얻게 된 이점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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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8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든 화약 무기의 위력은 1380년(우왕 6년) 8월 진포해전의 승리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왜구의 피해를 줄이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사후 의정부 우정승⋅영성부원군으로 추증되었고, 아들 최해산에게 기술을 전수해 조선의 화약 무기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첫째, 최무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였습니다. 그가 화약 개발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성장 환경과 관련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의 아버지 최동순은 관리들의 녹봉에 관한 일을 맡은 광흥창 관리로 전국 각지에서 예성강 하구로 들어오는 조운선의 곡식을 관리하였습니다. 당시 왜구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 해안에 출몰하며 특히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렸습니다. 아버지의 업무가 왜구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최무선은 자라면서 그 근절 방안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그가 천성적으로 기술과 병법을 좋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찍이 아버지가 관직 생활을 하던 개경에서 자라면서 원의 선진 기술과 문물들을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 중 ‘화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약은 이미 10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은 일찍이 고려에도 수입되었으나 주로 불꽃놀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뒤 14세기 중반부터 일본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왜구가 해안에 자주 등장해 피해가 극심해지자, 이를 퇴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약 무기가 주목되었습니다. 최무선의 건의로 인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는 화약 무기를 전함에 장착해 적선을 불태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1373년(공민왕 22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전함에서 사용할 기계⋅화약⋅유황⋅염초(초석)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1374년(공민왕 23년) 5월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그밖에 필요한 약품을 공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명은 이때 완성된 화약을 보내지 않았고, 고려의 공장들이 염초를 고아 만드는 법을 몰랐기에 화약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화약 제조 기술은 최첨단 기술이어서, 중국은 완성된 화약이나 원료를 약간 주기는 했지만, 그 제조법은 계속 비밀에 부쳐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최무선은 화약을 전투에 사용할 만큼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는 이를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용되던 흑색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염초⋅유황⋅목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유황과 목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 즉 질산칼륨은 특수 토양에서만 채취되어 추출이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세 가지 연료의 배합 비율이 적절해야 폭발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중국에서 온 염초장 이원에게 염초를 추출하는 비법을 전수 받은 후,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폭발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원료 배합 비율을 알아냈고, 마침내 화약 제조에 성공하였습니다. 화약의 발명은 당시 사람들이 그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둘째, 최무선은 1377년(우왕 3년) 10월 화통도감을 만들어 화약 무기를 제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1373년(공민왕 22년)에 이미 화전⋅화통을 시험 발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최무선이 실시한 실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발사 장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금속 기술이 필요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금속활자, 종, 불상 등 금속 가공 기술이 상당했으므로 이를 무기 기술로 응용할 여지가 충분하였습니다. 화통도감 설치 이전에도 수입이나 중국 무기의 모방을 통해 여러 종류의 화약 무기는 존재했지만, 전문적 화약 제조소인 화통도감의 설치로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은 한층 더 발전하였습니다.

    셋째, 화통도감 설치 후 최무선은 대장군⋅이장군⋅삼장군 등 여러 종의 화기를 개발해 실전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1378년에는 화통방사군을 편성해 화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는 문헌을 통해 그 이름밖에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 화기를 통해 추측해 볼 때 불화살을 쏘아 적선을 불태우기 위한 것과 철탄환을 쏘아 침몰시키기 위한 것으로 크게 나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 대장군⋅이장군⋅삼장군은 발사 장치로 화살이나 돌, 철탄환 등을 쏘아 보낸 것이고, 질려포는 쑥, 화약, 쇠파편 등을 섞어 넣고 발사해 적진에서 폭발시켜 적을 죽이고 연기를 일으키는 무기였습니다. 또 유화⋅주화⋅촉전화는 조금씩 다른 일종의 로켓 형 화기로 적을 교란하거나 적진을 불태우는 화공 등에 쓰였고, 신포는 일종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최무선은 화약의 발명에 그치지 않고 화통도감을 만들어 국가 주도로 화약을 자체적으로 양산하고 화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여, 결국 우리나라 화약 기술과 무기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넷째, 최무선은 아들 최해산을 통해 기술을 후대로 전승하였습니다. 화통도감은 설치된 지 10년 남짓 존속하다가 1389년에 조준 등의 건의로 혁파되어 군기시에 소속되었습니다. 이는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어 화포의 필요성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반대파의 손에 화약 무기가 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화통도감의 혁파로 화약 생산이 일시 중단되는 듯했지만, 태종이 화약 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이면서, 당시 화약 기술을 가진 유일한 기술자인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군기주부로 특채하였습니다. 최해산은 화약의 성능을 크게 향상했고, 화차를 만드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화약 제조 기술은 국가에서 본격적으로 관장하여 세종 대가 되면 전국 여러 곳에서 화약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렇듯 최무선의 화약과 화약 무기는 아들을 통해 전수되어 이후 조선 왕조의 국방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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