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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5.21

왜 양녕대군은 민씨 형제들을 고발한건가요?

안녕하세요?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은 민씨 형제들이 삼촌이고 또 어렸을때 부터 돌봐줬는데 왜 양녕대군은 민씨 형제들을 고발해서 죽인걸까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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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 이후 본격적인 국왕 준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부터 세자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후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면서 놀고 사냥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어 세자전의 환관들이 대신 매를 맞기도 했다. 식사 예절이 좋지 못해 부왕으로부터 혼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매번 부왕의 꾸중만 들었던 것은 아니다. 1407년(태종 7) 9월에 양녕대군은 백여 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명에 가서 반년이 넘는 사행 일정을 소화했는데, 출발 당시 세자는 14살에 불과했다. 태종은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세자가 매우 대견스러웠다.

    조선 건국 이후 대명관계가 안정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태조대의 국호 결정이나 태종 즉위 후의 고명(誥命, 황제에게 왕위를 승인받는 문서)과 인신(印信) 하사 등의 성과는 조선과 명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 양녕대군이 영락제(永樂帝)를 만나고 왔던 것은 양국 간 대외관계의 안정에 있어서 의미가 컸다. 또한 조선 건국 이후 세자가 명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도 정치적 위상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태종도 자신이 왕자 시절에 명에 다녀온 일들을 회상하며, 성장한 세자의 외교적 성과에 대해 만족스러워 했다.

    다만 그러한 부왕의 기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자가 사행을 떠나기 전 조정의 상황이 매우 복잡했다. 우선 몇몇 대신들이 세자와 명 황녀의 혼인을 추진하다가 무산되었다. 그 계획은 공부(孔俯), 이현(李玄) 등이 제안했지만, 양녕대군의 외가인 민제(閔霽), 민무구(閔無咎) 일가를 비롯하여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조영무(趙英茂) 등의 핵심 관료들도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명 사신 황엄(黃儼)이 조선에 와서 혼인 관련 논의를 꺼내지 않자 태종은 세자를 김한로의 딸과 혼인시켰다. 결국 명 황실과의 혼인은 백지화되었다. 조정에서는 혼인을 논의한 배경에 대해 각종 논란이 양산되고 있었다.

    세자의 사행을 기점으로 하여 민무구, 민무질(閔無疾) 등 외삼촌들의 불충(不忠)에 대한 탄핵도 이어지고 있었다. 민무구 등이 “세자 이외에 왕자 중에는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가 없어도 좋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세자를 따라 명에 다녀왔던 이지성(李之誠)의 발언까지 문제가 되었다. 사행 중에 이지성이 민무구 형제의 무죄를 언급한 사실을 세자가 태종에게 아뢴 것이 뒤늦게 밝혀졌던 것이다. 세자의 폭로는 결국 외삼촌들의 처벌에 영향을 끼쳤다. 몇 달 후 외할아버지 민제(閔霽)는 세상을 떠났고, 이후 민무구 형제도 죽임을 당했다.

    명에서 돌아온 이후 세자의 일상을 보면 명 사신을 접대하고 강무(講武)를 수행하거나 제례를 대신 주관하는 등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적절한 행실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행실은 학문을 게을리 하고 사냥이나 내기 등을 일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마음대로 궁을 나가 연회를 베풀고 다른 사람의 첩을 강탈하는 등 세자의 행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양녕대군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조 태종 때 조호의 ‘난언(亂言)사건’

    태종은 외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처남인 민무구, 무질 형제를 역모로 몰아 제주도에 귀양보내 놓고 있었다. 당시 예문관 태학사 등을 지낸 조호가 어느 날 아내와 이야기하던 중 민씨 형제 비호 발언으로 유배 중인 이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호는 이무의 당당한 풍체를 떠올리며 “이무 정승은 풍채가 매우 아름다워 왕이 될 제목인데…” 지나가는 말로 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아내와 묘음이라는 여승이 와 있었다. 조호는 묘음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실언을 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돼 이무가 유배지에서 처형되자 묘음은 유혜강이라는 자를 찾아가 물었다. “일전에 조호 대감 댁에서 이무 정승이 왕이 될만한 풍채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정승이 처형된 것은 그 풍채 때문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유혜강은 곧바로 관가에 고발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이무와 절친했던 민무구 형제에게 사약을 내렸다. 민무구, 무질이 죽은 후 아우인 민무흘과 민무희가 양녕대군에게 “두 형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보위에 오르거든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태종은 이들 두 형제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조호의 한마디 실언이 자신은 물론 민씨 4형제의 목숨까지 잃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