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은 무슨 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사의의 난은 무슨 사건이었나요?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게 된 계기와
조사의의 난의 전개과정이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사의의 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 조사의가 태종 2년에 일으킨 난으로 30여 년 간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던 불패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한 이성계 인생 최후의 전투입니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과 방석이 희생되었고 안변 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은 그 원수를 갚는다면서 태종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했습니다.
안변을 중심으로 동북면 전 지역이 거점이며 여진족의 참여 가능성 조정에서 박순, 송류 등을 파견해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죽음을 당했고 초기에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를 격파하나 그 후 관군이 군을 재정비하고 재공격을 가하자 반군은 무너졌고 조사의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사의는 조선전기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입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402년(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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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사의의 난 (趙思義-亂)은 1402년 11월 안변 부사 조사의 가 이성계의 고향인 동북면 (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하는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으로 방번과 방석 (芳碩)이 희생되었고 이성계는 아마도 이렇게 자신의 또다른 아들들을 죽인 이방원에게 너무 화가 났을 것 입니다. 마침 안변 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 (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조카 강현은 그 원수를 갚는다면서 태종 (이방원) 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이성계) 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하였다가 실패 한 난을 말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친척으로 1393년(태조 2)에 형조의랑이 되고, 그 뒤 순군(巡軍)을 거쳐 1398년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402년(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을 죽이고, 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내려오던 도중 이천우(李天佑)의 유기(遊騎) 100여 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다가 고맹주(古孟州)에서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사기를 잃은 부하들이 이산하자 그는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관군에게 체포, 주살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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