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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12.06

봉오동전투는 어떠한 전투였는지 궁금합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이 싸운 전투라고 알고 있는데요.

봉오동전투에 참여한 인물과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고,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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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써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으며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전투가 어떤 전투였는지 궁금하군요.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라고 합니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독립군 1300명이었고 일본군은 500명이었습니다. 일본군 157명 사망 300여명 부상자가 발생한 반면 독립군은 4명 사망과 2명 부상에 불과한 대승리를 이룬 대첩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1 운동 이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일본 군경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에 계속 시달리던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으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를 맞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등이 연합 부대를 형성하고,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봉오동전투, 1920. 6.).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데 비하여 독립군 전사자는 4명뿐이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 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 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추진,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해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해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합니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었으며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립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 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중국 영토를 침입해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고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 궤멸시킵니다.

    일본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는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해 독립군의 사기가 높아지며 1920년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강점기 중반인 1920년 6월 홍범도를 필두로 최진동, 안무 등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둥(鳳梧洞, 한국명 봉오동)에서 정규 일본군인 월강(越江) 추격대대와 교전한 사건으로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 등이라고 독립신문에서 발표하였습니다.